■ 편집자의 책소개
우리는 거리에서 노래하고
거리에서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마시고
거리에서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리고 거리에서 죽는다
서로의 몸속을 보여줄 만큼
거리는 이제 아주 사적인 공간이므로
투명인간들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소년은 눈물을 훔친다 _「우는 아이」 부분
말없는 식사를 가로지르는 무뚝뚝한 금속성
가장 극심한 소외가 침대 위에 있듯이
네모반듯한 식탁 위에서 모든 사랑은 다 질투였을 뿐
모든 식욕은 다 굶주림이었을까요?
무방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의심으로부터 놓여났다 _「동물성」 부분
때리면서 아프냐고 묻던 고참병
대답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고마웠다
아프다도 아니고 안 아프다도 아닌 괜찮습니다
도대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들이란 뭐지? _「괜찮은 생각」 부분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이현승 시인의 첫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를 문학동네포에지 20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2007년 8월 랜덤시선 29번으로 처음 선보이고 14년 만에 입은 새옷이다. 3부 55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의 운명, 이것이 우리와 소년의, 그리고 세계와 존재와 시간의 운명”이라는 해체적 미니멀리즘을 보여주면서도 생의 참혹에 대응하는 따뜻하고 은근한 유머를 놓지 않는다(강계숙). 어떻게 분명 있었던 것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가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태들의 한가운데를 함께 살아져/사라져가고 있는지. 아이스크림을 ‘I scream’으로 읽는 순간(정한아) 우리는 길 위에서 얼음조각처럼 녹아내리는 아이의 울음과 공명하며 깨닫는다. 투명인간들이 거리를 유령처럼 활보하고 있음을. “나는 햇빛, 나는 수증기, 나는 물방울./비로소 나는 당신의 내부에 있습니다.”(「도망자」)
거대하게 출렁이는 마실 수 없는 물들 앞에서 나는 목구멍에 소금을 처넣은 듯 목이 마르다(「해변의 여인」). 우주에 물고기 한 마리와 단둘이 남겨진 기분. 먹을 것이냐 외로워질 것이냐?(「기침 사나이」) 늘 배가 고픈 늑대의 식성 앞에서 가족들의 식사는 용맹하다. 악어의 입에 자신의 머리를 넣는 곡예사처럼(「늑대가 나타났다」). “핏물이 배어나더라도/모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무신경하게 이를 닦”고 “입냄새를 지우고 거울 앞에서 이- 하며 한 번은 억지웃음을 짓”(「서사에 대한 모욕」)는 이 “가학의 도시에서 나보다 먼저 시민권을 얻은 저 권태의 새”(「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일기(日氣)와 사람의 마음은 어떤 곡선을 그리면서 비껴갈까”(「피터팬과 몽상가들의 외출」). 시인은 유머를 생각한다. 유머는 강력한 이빨을 가진 자만의 것. 악어나 사자같이 물어봐 물어봐 하다가 정말 꽉 물어버릴 수 있는, 물어버릴지 모르는 자들의 것이다(「찰리의 저녁식사」). 또한 웃음은 보호막, 문지르면 더 잘게, 더 많이 일어나는 비누거품 같은 것. “나는 작은 거품들에 둘러싸인 비누가 손안에서 미끌거리는 것을 본다” “작은 웃음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웃음 속의 공포”를(「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리턴, 리턴, 리턴, 그리하여 무한 반복하는 삶(「슈퍼맨 리턴즈」). 시인은 “통조림에도 고유번호가 있다는 사실에서/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시인의 말). 손깍지를 풀면서 완성되는 기도.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 지도는 만들어지면서부터 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들은/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모래알은 반짝」).
도망을 이해하려면 말야
아이스크림을 봐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
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아이스크림은 포효하고
아이스크림은 분노하고
아이스크림은 자살 협박을 하고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아이스크림은 도망을 이해할 수 있지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
아이스크림은 도주하지
아이스크림은 사라지지
가령, 날렵한 혓바닥은
흔적을 지우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꼬리 같아
도망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늑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을 밝히겠지
늑대들은 새빨간 혓바닥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처럼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리지
잽싼 손놀림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투명에 가까워질 수 있지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
어느 날 위치가 바뀌어 있는 책상 위의 물건들처럼
혹은 아이스크림처럼, 또 늑대처럼 나는 사라지지
_「아이스크림과 늑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