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순간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알기 때문이다.
무서운 마음 너머에 있는, 잘 살아가려는 마음을.”
_최진영(소설가)
등단 10주년, 한 작가가 완성한 불안과 희망의 연대기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쓰인 황현진 첫 소설집
기구하지만 현실적인 불행과 공존하기로 마음먹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공통감각, 불안을 직시하고 어루만지는 차분한 문장들
한두 문장만으로 인물의 독특한 성정은 물론, 그들이 구태여 드러내지 않은 진심까지 탁월하게 포착하는 소설가 황현진의 첫 소설집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이 출간되었다.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그의 등단 10주년에 그간 발표해온 단편 중 11편을 정선해 묶게 된 셈이다. 그 과정을 짐작해보면 작가가 어떠한 자세로 소설쓰기에 임해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책 한 권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내놓고 싶어질 때를 기다려 내놓은 소설집인 만큼, 허투루 쓰인 표현 없이 단정하게 완성된 단편들에서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발견된다.
작품의 등장인물들도 작가 황현진의 모습을 조금씩 나눠 받은 듯하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불운과 불행에 괘념치 않고 자신의 삶을 직접 결정하려는 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황현진은 갖은 시련에 달관한 듯 차분한 문장으로 인물들의 불안감과, 그 불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작은 희망에 대해 쓴다. 이 차분함은 안정제처럼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어 소설 속에 그려진 현실과 인물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인생의 시련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통감각이라 할 불안을 다루는 동시에 불안을 다독여주는 품 넓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 터. 황현진은 이러한 불안이 ‘잘 살아가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드러내며 독자를 위로한다.
황현진 소설의 인물들은 결코 순탄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 없다. 타인이 경솔하게 씌운 누명, 상황을 타개하려 할수록 점점 불어나는 비밀,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 등, 인생의 난경이 처절하지만 현실감 있게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우산은 하나로 충분해」의 딸은 의류 매장에서 옷을 든 채 엄마와 전화로 실랑이를 벌이다 무심코 밖으로 나와 도둑으로 몰려버리고, 「내가 원했나봅니다」의 화자는 직장 선배의 부당한 폭력에 문제제기한 후 의도적으로 선배를 밀어냈다고 의심받는다. 「비밀은 한 가지」의 ‘문주’는 결혼하며 직장 동료들에게 축의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는 민망함에 이혼 사실을 숨기려다 자꾸만 일을 키우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므로 타인에게도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배반당하고, 상대를 있는 힘껏 배려한 결과 불명예를 떠안게 되는 잔혹한 세계가 황현진의 소설세계다.
거대한 폭력을 당한 인물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으면 쓰일 수 없는 서술이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고 싶어요」는 발달장애를 지닌 화자의 목소리로 서사를 이끌어나감으로써 장애인의 사고방식과 내면의 상처를 생생히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키스와 바나나」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전쟁고아 ‘키스’가 적의 목숨을 살려준 끝에 적에게 보복당하고, 키스의 동료들이 그에 대한 보복에 나서는 처참한 광경을 그리며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헛된 적개심에 휩싸인 병사들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친부에 의해 성매매에 동원되는 딸이 주인공인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주점에서 일하다 만난 남자 손님과 결혼한 후 더욱 비참해진 한 여성이 등장하는 「언니의 십팔번」과 같은 작품들에 표현된 적나라한 비극 또한 황현진의 공감 능력과 타인에게 감정 이입하는 힘을 보여준다.
슬프게도 황현진의 인물들은 곡절 많은 인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점에서 황현진 소설은 기구하지만 현실적이다. 중요한 점은 이리저리 흔들리던 이 인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중심을 바로 잡고 삶의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굳게 믿어주며 함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서는 엄마에게 슬며시 마음을 열기로 한 딸(「우산은 하나로 충분해」), 외부의 결정에 의해 떠나거나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화자(「내가 원했나봅니다」), 자신을 포기하려는 엄마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다고 간절히 말을 거는 장애인(「하고 싶어요」), 친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후 다시 태어난 듯 낯선 희망을 발음해보는 딸(「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들에게서는 분명한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
불확실한 미래를 직시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하는 인물들의 담대해진 시선과, 삶의 굴곡을 온전히 받아들여 강인해진 황현진의 시선이 겹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해피 엔딩’이 아니라, 불안과 공존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다행한 엔딩’이다. 한 작가가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완성해낸 불안과 희망의 한 연대기 역시 이로써 다행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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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소설에는 선의와 악의, 걱정과 욕심, 관심과 폭력, 불운과 불행이 경계 없이 아슬아슬하게 뒤섞여 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인물의 뒤를 따라가다 끝에 이르면 깔끔한 개념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이 남는다. 그건 마치 둘은 멀쩡한데 하나는 터져버린 마음 같고, 터져버린 하나가 나머지를 모두 적셔버리는 상태와도 같고, 멀쩡한 둘을 타인에게 주고 터져버린 하나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사람의 표정과도 비슷하다. 어째서 둘은 멀쩡하고 하나만 터졌나. 터진 것에게도 터지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그리되었나. (…) 내게 언니의 소설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내 보기엔 모두 다행이야, 친구.’ _최진영(소설가)
황현진의 소설을 읽으면 바람 한 점 없는 날 올려다본 하늘에서 구름 한 점이 서서히 이동하는 것을 목격할 때의 심정이 된다. 그가 소설에 그리는 세계와 현실세계는 너무나 다르지만 또한 어딘가 너무 닮아 있어서, 마음이 그의 소설 속으로 이끌리듯 기울어진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 구름이 이동하는 것처럼, 황현진의 소설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전혀 모르기도 했을 ‘그곳’의 압력을 높여 그 이야기들이 ‘이곳’으로 서서히 흘러들도록 한다. 당신은 소리치며 도망칠 수도 있고 조용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부터 전해져온 소설들을. 그리하여 그곳과 이곳을. _김나영(문학평론가)
■본문 중에서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을 뿐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일 아니야. 오해는 늘 일어나는 일에 불과해.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어떤 누명이라도 벗어날 방법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 열심히 자신을 변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칫 자기연민이나 자기과시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일 테니까. _「우산은 하나로 충분해」, 14쪽
나는 오해를 풀려고 자진해서 조그만 사람이 되어 고개를 한껏 깊이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해 움츠러들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마음은 미안해서가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생겨나는 거였다. _「내가 원했나봅니다」, 67쪽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내가 지금껏 비교적 행복하게 살아왔던 건 둔감해서였다고 해두자. 하지만 행복과 둔감이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어떤 단어라도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잘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호영의 답장이 늦는다. 견디다보면 결국 누군가를 닮게 될 뿐이라는 걸 호영은 알까. _「내가 원했나봅니다」, 88쪽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있어, 입니다. 있어? 라고 물어본 다음 있어, 라고 대답하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엄마에게 묻고 싶은데 엄마가 너무 울어서 못 물어봅니다. 나는 아직 사랑하는 기분이니까요. 잊지 않을 때가 아니니까요. 벌써 기억 아니니까요. _「하고 싶어요」, 116쪽
왜 안 죽였어?
전략촌 밖을 돌아다니는 민간인은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상기시켰다.
한 번쯤 안 죽이고 싶었거든.
키스가 소총을 끌어안고 천진하게 대답했다. 순간 키스를 뺀 나머지 모두는 알 수 없는 시기심이 끓어올랐다. _「키스와 바나나」, 129쪽
그래서 나는, 조금도 떳떳하지 못했다. 어리지도 않은 게 울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나니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지를 못했다. 나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것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그들에게는 소원이랄 게 없다. 얼굴을 높이 쳐들면 나를 내려다보느라 더 깊게 수그린 아버지의 고개가 가장 먼저 보였다.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빳빳이 세운 자세로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_「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179쪽
우리는 모두 언니의 동생들이었다. 언니가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면 우리가 제일 먼저 마셨으니까. 적어도 우리만은 언니를 언니라고 불렀으니까. 진아를 진아라고 부르지 않았으니까.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 인용 소파에 새끼 혼자 남았다. 삼촌은 카운터 안쪽의 둥근 의자에 등을 지고 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혼자이도록 자리를 떴다. 진짜 써비스였다. _「언니의 십팔번」, 222쪽
■차례
우산은 하나로 충분해 _007
비밀은 한 가지 _035
내가 원했나봅니다 _055
하고 싶어요 _089
키스와 바나나 _117
츠츠츠 _143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_173
언니의 십팔번 _201
우리 연애의 미래 _223
지인의 말에 따르면 _235
아무도 진짜로 죽지 않아 _245
발문|최진영(소설가)
이렇게 우리는 다행입니다 _265
작가의 말
모두가 허무로부터 다행입니다 _281
■황현진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두 번 사는 사람들』 『호재』, 중편소설 『달의 의지』 『부산 이후부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