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기묘하게 재현하는 위험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될 것이다.” _박민정(소설가)
문학동네신인상 수상작가 이나리 첫 소설집
쉽게 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문제적 개인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감각에 대해 재질문하는 이나리의 첫 소설집 『모두의 친절』이 출간되었다. 2014년 단편소설 「오른쪽」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했을 당시 작가에게 쏟아진 “자신만의 목소리가 뚜렷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독특한 시선과 화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가” “서늘하면서 깔끔한 단편소설의 맛을 잘 아는 작가”라는 찬사는 이 신예작가가 이후 축조해나갈 소설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등단작인 「오른쪽」은 자식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로, 교육과 모성을 둘러싼 첨예한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그에 대한 기존의 윤리를 강화하는 대신 그것을 무참히 허물어뜨림으로써 우리에게 충격과 함께 낯선 매력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오른쪽」을 비롯해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쓰인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은 이처럼 도덕규범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을 제시하는데, 이들은 대개 여성일 때가 많다. 예민하고 거친 이 여성 인물들은 우리가 작품 속 인물에게 기대하는 바를 배반함으로써 그간 익숙하게 여겨져온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우리를 안내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항상 올바르고 다정할 것을구받는 우리에게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도 한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잖아요.
마치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깊이 친해지는 일 말이에요.
언니와 내가 딱 그랬어요. 언니와 나는 너무 잘 맞았어요.
지난밤 전까지는요.”
다정하지도 올바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거칠고 예민한 여자들이 일깨우는 날카로운 감각
소설집의 문을 여는 「완벽한 농담」은 성적인 것에 이제 막 호기심을 갖게 된 여자 중학생을 화자로 내세운다. 흔히 ‘까진 아이’라고 여겨지는 친구 ‘미루’가 ‘나’를 문구용품점으로 이끌며 도둑질을 하자고 말하자 ‘나’는 잠깐 고민하지만, 이내 립글로스를 움켜쥐고 문구용품점을 빠져나온다. 자랑스레 립글로스를 보여주려는 ‘나’에게 미루는 도둑질을 하자고 했던 건 농담이라며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그뒤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유기된 아이가 있다는 신고를 받았는데 혹시 아는 게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전날 미루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가로등 아래 버려진 검은 봉지를 발견했었다. 설마 그 안에 아기가 담겨 있던 것일까. ‘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완벽한 농담인 것만 같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그대로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때가 우리가 성장하는 순간을 일컫는다면, 「완벽한 농담」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새로이 인식하게 된 여자아이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이 맞부딪치는 순간을 그려내는 긴장감 넘치는 서술은 표제작인 「모두의 친절」에서도 이어진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옆집 여자가 ‘나’에게 아이를 맡겨온다. ‘나’는 여자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선량한 호의’로 여자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 일이 생겨 아이를 돌보지 못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나’에게 여자는 “그걸 왜 이제 얘기해? (…) 이 시간에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라고 소리치며 짜증을 낸다. ‘나’는 여자의 뜻밖의 반응에 자신이 아이를 맡지 못하는 상황이 미안해야 할 일인지, 미안해야 할 일인데 자신이 염치가 없는 건지 헷갈린다. 그리고 다음날 여자가 엄청난 기세로 현관문을 두드리며 울먹인다. 아이가 사라졌다고. 아이가 사라진 건 ‘나’가 베푼 ‘친절’을 아무렇지 않게 여겨온 여자에게는 당연한 결과인 걸까. 「모두의 친절」은 어떤 사건의 인과관계를 감정을 둘러싼 문제로 이해하려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을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인물이 지닌 예민함과 불안을 세밀하게 서술하는 이나리의 특장은 그 인물이 부부일 때 극대화된다. 「비타민」 「바퀴벌레」 「타조 아니면 낙타」는 모두 부부 사이의 균열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다. 옆집의 어린 여자와 남편 사이에서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신경증에 가까운 불안을 느끼는 아내(「비타민」), 혼자 집에 있을 때만 나타나는 바퀴벌레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맞닥뜨리는 남편(「바퀴벌레」), 부부 동반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가, 그간 누적되어온 남편에 대한 불만을 묘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 아내(「타조 아니면 낙타」) 등, 이나리는 겉으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일상 아래에서 부풀어오르는 기포를 하나하나 집어들어 그 세부를 면밀하게 관찰한다. 그렇게 그 기포들은, 우리의 귓속을 간지럽히는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벌레처럼, 우리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며 모종의 불안과 불편을 유발한다. 분명 어떤 일이 일어났지만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 다만 앞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인물처럼(「유턴 지점을 만나게 되면」), 이나리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느껴질 때, 실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웅웅댈 때, 그저 그것을 들여다보며 작은 기척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니냐고 묻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나리는 가청영역 밖의 미세한 소리를 포착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어그러뜨리는 ‘무언가’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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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의 등단작 「오른쪽」을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을 기억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그악스러운 진술,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듯 위태롭게 끝을 알 수 없는 외길로 내달리던 독서의 경험. 이나리의 인물들은 대개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강박과 두통과 지긋지긋함에 시달린다. 자꾸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 때문에 아무 일도 없는데 조바심 나는 일상을 보내느라 많이 지쳐 있다. 그러나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여버리고 싶기 때문에’ 내내 긴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결의 긴장이 있다. 그토록 인간들이 지겹다면서 순정하게 드러내버리고 마는 죄책감이다. 그 죄책감의 이상한 가역반응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악마에게서 도망치다 찾아든 곳이 바로 그 악마의 품임을 실감하게 하는, 삶을 기묘하게 재현하는 위험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될 것이다. _박민정(소설가)
이나리의 인물들은 유난히 예민한 사람들이다. (…) 이 예민한 감각은 미래를 전망할 수 없는 인물들이 겪는 증상이자, 전망을 결핍한 소설의 징후라고 봐도 좋다. 전망이 소거된 소설의 시간 안에서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하게 순간을 경험하는 것뿐일 테니까. 그렇게 소설의 시간이 늘어지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낯설고 기이한 순간이 속살을 드러낸다. _임정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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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가.
사람들 각각은 언어도, 문화도, 법률도 모두 다른 독립된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그런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 세계들이 맞닿아 부딪치는 순간을 말하고 싶었다.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너는 그 풍경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런 목소리들이 아주 흔하게 들려오는 세계에 대해서. 그런 농도 짙은 농담들에 대해서. 몰라서 그때 무심할 수 있었다는 걸, 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완벽한 농담」, 24쪽)
원영은 문장의 주인을 슬쩍 쳐다보았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던가. 대학교를 갓 졸업한 취업준비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던 기억이 났다. 취업준비생이라고는 하지만 원영의 눈에는 여느 대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취업에 대한 걱정과 준비생이라는 허울을 같이 가지고 있는 밝은 학생들 말이다. 원영은 그런 밝음이 부러웠다.(「모두의 친절」, 49쪽)
원영은 천천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름대로 단정하게 꾸몄지만 알고 보면 남루한 옷들에 대해서. 저 여학생이 쓰는 립스틱보다 저렴한, 핸드백 속 자신의 화장품에 대해서. 그리고 더 많이, 더 자주 뱉어지는 어떤 말들에 대해서.(「모두의 친절」, 54쪽)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상당히 어린 부부처럼 보였고 그때마다 곤란해지는 건 그녀였다. 그녀는 생각으로만 그쳐야 하는 말들에 대해 고민했다. 말수가 적을수록 이웃들은 좀더 친절해졌다.(「비타민」, 70쪽)
아내는 내가 바퀴벌레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 실망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바퀴벌레를 보고 도망친 남편에 대해서도 정말 실망하지 않았을까. 견디는 것과 도망치는 것은 달랐다.(「바퀴벌레」, 100쪽)
나는 그애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작고 보드라울 줄 알았죠. 종아리를 살짝만 때려도 빨간 줄이 선명하게 비치던 때처럼 말이에요. 그 시절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줄 알았다면, 좀더 확실하게 가르쳤을 텐데 후회가 돼요. 결국 훈육이 되는 시기를 모두 놓친 건 내 탓이니까요.(「오른쪽」, 137쪽)
살다보면 지나가버리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런 게 있었지, 하고 알아채게 되는 사소한 삶의 조각 같은 것들.(「유턴 지점을 만나게 되면」, 188쪽)
밤에 불을 켜면 벌레가 달라붙잖아. 왜 그런지 알아? 무서워서 그래. 밤이 무서워서 조금이라도 밝은 곳으로 달려드는 거야.(「유턴 지점을 만나게 되면」, 192쪽)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뿐이었다.(「유턴 지점을 만나게 되면」,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