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궂은 악동 토미,
그는 머지않아 훨씬 치명적인 것을 뿜어낼 것이다.
혼란한 정세 속을 불꽃처럼 살다 간 청년의 일대기이자
영웅적 인물을 되살려내려는 영화인의 치열한 제작 후일담
“역사학자들은 실제 감행됐던 작전들을 언급하기에도 너무 바빴고,
그래서 그것들 가운데도 열거되지 못한 채 영원히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본문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프랑스가 독일 점령하에 놓였던 격동의 시대, 당시 독일군에 맞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투쟁했던 프랑스 이민자들이 있었다. 『토미의 무덤』은 ‘이민노동자 의용유격대’에 소속되어 파리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던 실존 인물 토마 엘레크(1924~1944), 일명 ‘토미’와 오늘날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영화감독인 ‘나’, 그리고 토미 역에 발탁되어 배역에 무섭게 몰입하는 고등학생 초보 배우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 속에 가상의 영화 장면 묘사와 영화제작 후일담과도 같은 ‘나’의 서술이 교차되며 실제 역사책에도 기록되지 못한 채 잊혀가던 인물을 재조명하고, 영화감독과 배우 등 창작자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이 펼쳐진다.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해온 프랑스 작가 알랭 블로티에르는 소설을 집필하며 참고해온 사진 및 서간, 당시의 심문조서 등의 미공개 자료들을 온라인에 게재해 독자들과 공유한다(www.letombeaudetommy.net ). 작가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는 가상의 영화를 소설 속에 묘사하며 영화감독 ‘나’와 배우 가브리엘이라는 두 허구의 인물을 통해 영웅적인 실존 인물 토미의 일대기를 세심하게 되살려낸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독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실존 영웅 토미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배역에 치열하게 매달리는 오늘날의 청년 가브리엘, 그리고 두 인물 사이를 잇는 영화감독인 소설의 주인공 화자까지 역사와 허구 속의 세 인물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될 것이다.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하나가 된 아름다운 두 청년과
그들을 사랑한 창작자의 이야기
오래전부터 실존 영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영화감독인 나는 ‘이민노동자 의용유격대’의 일원으로 무장 항독 활동을 펼쳤던 헝가리계 유대인 이민자 토마 엘레크, 일명 ‘토미’에 대해 알게 된다. “죽을 각오는 물론이고 죽일 각오도 된 그 시대의 청년들” 가운데 영화의 주인공으로 토미라는 인물을 선택한 건 그의 레지스탕스 가담 동기가 훨씬 복잡하고 덜 진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토미의 외모도 한몫했으리라. “유대인을 원숭이나 생쥐처럼 그리던 그 시대에” 토미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새하얀 피부, 금발의 곱슬머리를 갖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가 대대적으로 떠벌린 유대인의 신체 특성을 완전히 반박하는 외모”로 단박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토미의 어머니 엘렌 엘레크가 쓴 실존 회고록 『엘렌의 기억』(1977)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갖가지 자료들을 섭렵하고 영화제작을 준비한다.
토미의 유년기부터 그가 독일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던 청년기 토미의 역을 맡을 주인공을 찾는 일은 난항이었다. 에이전시에서 소개해준 배우들을 만나보며 일주일에 걸쳐 오디션을 진행하고, 캐스팅 매니저를 파견해 길거리 캐스팅에도 도전했지만 마음에 드는 토미를 끝내 찾지 못한다.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타지오를 찾는 비스콘티 감독의 심정으로” 토미를 찾아 헤매던 나는 결국 캐스팅에 실패한 채 영화제작 계획을 미루고, 1년이 흐른 어느 겨울날 길에서 우연히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춤을 추듯 질주하던 고등학생 가브리엘을 만나 캐스팅에 성공한다.
내가 원하는 건 토미 자체였다. 벌써 몇 달째, 나는 그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 그의 흔적을 좇고, 그가 갔던 길을 걷고, 그의 기분을 헤아리고,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그의 얼굴을 모조리 찾아내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그가 다녀간 곳들의 문을 두드려보고, 그가 거쳐간 장소들의 냄새를 맡고, 그가 입었던 옷들을 알아내고, 그의 필체를 분석했다. 나는 그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그의 완고함, 오만함, 그리고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극도의 강경함에 반했다. (27쪽)
가브리엘은 토미와 놀랍도록 닮았지만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나는 가브리엘에게 토미에 대한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준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가브리엘은 맡은 배역에 무섭게 몰입하고, 말투와 목소리, 걸음걸이마저 바뀔 만큼 토미와 동화되어간다. 극도로 예민해져 말수까지 줄어든 가브리엘이 촬영장에 나올 때면 촬영장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스태프들은 긴장을 놓지 못한다. 한편 가브리엘은 토미에 대한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 읊어 나를 놀라게 만든다. 토미라는 인물이 영화 속에 생생해질수록 가브리엘은 사라져갔다. 나는 고문과 처형 장면 촬영을 앞두고 토미라는 인물에 감화되어 배역에 점점 깊이 몰입하는 가브리엘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촬영을 계속해도 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가브리엘은 과거에 토미가 살던 방에 세를 들고, 토미의 유령이 사는 그 작은 방, 그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가브리엘과 토미, 두 청년을 모두 구해낼 수 있을까.
허구의 인물들의 힘을 빌려 생생히 그려낸
사라져가는 기억 속의 진짜 영웅들의 이야기
『토미의 무덤』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이며 당시 파리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실존 인물 토마 엘레크의 삶에서 출발한다. ‘이민노동자 의용유격대(FTP-MOI)’ 소속으로 1944년 독일군에 체포되어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총살당한 그는 체포되기 전까지 열차 탈선 테러 등에 가담하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소설 속에는 그의 어머니가 집필한 실제 회고록과 사진 및 서간, 당시의 심문조서 등 작가가 입수한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구성된 토마 엘레크의 일대기가 생생하게 녹아 있다. 흔히 사람들이 레지스탕스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그는 정의감에 넘치는 냉혈한 투사가 아니었다. 작전이 끝나면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다. 굶주린 적도 없고 가난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영화나 소설들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오며 쉽게 눈물을 터뜨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는 달랐다.
소설에는 토마 엘레크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항독 운동에 가담했던 수많은 실존 영웅들이 등장한다. 일명 ‘마누시앙 그룹’으로 일컬어지는 이민노동자 의용유격대원 스물세 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언급되고, 토미의 동료들 몇몇은 작품 속에 보다 생생히 살아 있다. 특히 나치는 이 무장 항독 지하단체들을 단순히 잔인한 ‘살인 부대’로 선전하며 포스터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이것이 ‘붉은 포스터Affiche rouge’ 사건이고 토미 또한 이 포스터 속 열 명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언론평
『토미의 무덤』은 전기문도 억지로 미화한 영웅담도 아닌, 말 그대로 영감이 넘치는 책이다.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흐르는 시간의 체에 걸러지고 여과되는 과정. 텔레라마
아쉬운 것은 소설 속 영화 이야기를 진짜 영화로 만나보지 못한다는 점뿐이다. 렉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