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는 딱 나와 같은 부류였다.
회 접시에 깔린 무채나 과자 봉지에 들어 있는 질소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집에 돌아가면
얼굴이 가물가물한, 혹은 얼굴은 생각나도 이름이 어렴풋한,
한 반에 적어도 수십 명은 있는 어련무던한 존재들. _본문에서
늘 구석 자리에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아이, 오래전 헤어져야 했던 그리운 친구,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 그리고 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누군가까지. 어쩐지 흐릿하고 어렴풋한, 잊혔거나 잊히기 쉬운 B들의 세상이 책을 펼치는 순간 선연하게 드러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방문」)들을 마주하는 순간의 기쁨은 예상치 못한 것이기에 기이하고도 반갑다. 한편 『B의 세상』은 좀처럼 먼저 호명되지 않는, “공고히 결속된 원의 바깥에 있는”(「붉은 손가락」) 이들의 세상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금 다르거나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또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여러 형태의 폭력을 견뎌 온 사람들의 시야에 담기는 풍경이 『B의 세상』이라는 유리창을 액자 삼아 담겨 있다. 당연한 듯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 A라면, 최상희 작가는 A들이 애써 외면해 왔을 B들의 세상을 끄집어낸다.
A로 불리지 않는 이들의 세상이
잊히거나, 희미해지거나, 끝내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되니까.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한 세상의 윤곽을 더듬어 보게 된다. 명왕성 기숙학교로 향하는 은하열차, 유령이 출몰한다는 중세풍의 낡은 호텔, 매매혼이 공공연한 어느 시골, 입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고등학교의 교실 등 극단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덟 작품은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 또한 제각기 다르다. 각 작품의 화자는 B일 때도 있고 A일 때도 있으며 그러한 구도 밖의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사건의 드러난 실체와 감춰진 본질, 선과 악 등 혼돈 속에서 빨려들 듯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기존의 확신은 무너진다. 또렷했던 기존의 경계들 또한 모호해져 간다.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B였거나 B로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고 B가 될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둥글고 따뜻한 면,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점, 무섭도록 날선 모서리들로 이루어진 ‘B의 세상’은 결국 우리가 지금 발붙이고 있는 현실이므로.
언제부터 세상은 누군가가 참고, 참아야만 살 수 있는 곳이 된 걸까. _본문에서
세상의 균열, 그 틈새를 바라보는 시선의 날카로움은 인물이 처한 불편한 현실을 속속들이 들추어낸다. 그 날카로움이야말로 『B의 세상』이 독자를 안심시키는 방식이다. 외면하거나 무마하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 그리하여 B들이 줄곧 여기 있었음을 분별하는 것. 그 바탕에는 모든 존재를 향한 존중과 사랑이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민과 사랑”을 상기하기 위해 “연민과 사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겨져 오래전에 사라진”(「화성의 소년」) 세계를 무서우리만치 선득하게 그려 내는 작가를, 우리는 굳게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따금 발을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 필요한 위로는 어쩌면 “지금 세상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맞는다고 끄덕여 주는 한 권의 책일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