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을 읽는 일은 ‘비밀과 어둠과 암호 들’로
빽빽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_정이현(소설가)
또 한번 경신되는 편혜영 소설의 현재
2019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호텔 창문」 수록
우리를 둘러싼 일상을 고밀도로 압축해 보여줌으로써 표면화되지 않은 삶의 뒷모습을 감각하게 하는 작가 편혜영의 여섯번째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이 출간되었다. 소설집 출간을 앞두고 이루어진 손보미 작가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잡지에 발표된 소설이 책에 그대로 실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듯, 편혜영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쓰인 단편들 가운데 성격이 유사한 여덟 편을 골라 묶은 뒤 작품을 거듭 숙고해 퇴고했다. 그렇게 치열하고 꼼꼼한 수정을 거쳐 묶인 이번 소설집은 간결한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서스펜스가 여전히 선명한 가운데 그와 분리되지 않는 삶의 애틋함을 그동안의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와 관계를 새로이 돌아보게 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예외적인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등단 22년 차에 접어든 편혜영 세계의 한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에 묶인 작품들은 모두 인물들이 현재 머물던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시작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이 새로 옮겨간 공간은 대체로 인적이 드문 소도시나 시골이다. 그곳은 언뜻 평화롭고 목가적인 듯 보이지만, 동시에 고립되고 폐쇄적이며 외지인에 대해 배타적인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스무 번』에 실린 작품들은 시골이 가진 이런 이중적인 이미지 가운데 후자를 부각하면서 주변의 공간이 불현듯 낯설게 변하는 은근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한편 이들의 이동은 가족과의 관계 또는 과거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던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로 인해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던 어떤 문제가 이전과는 다른 자리에서 어느 순간 거대한 위협이 되어 이들을 조여온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골이 한순간 밀폐된 공간으로 변할 때,
우리를 타격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바로 가족일 때,
잠시에 불과했던 일이 평생에 걸쳐 지속될 때
철거되는 중인지 새롭게 지어지는 중인지 모를 건물처럼
우리를 둘러싼 이중의 조건과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편혜영의 물기 어린 시골-가족 설계도
소설집 처음에 자리한 표제작 「어쩌면 스무 번」의 주인공 ‘나’는 치매를 앓는 장인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산골로 이사한 참이다. 주위에 옥수수밭이 가득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삼백 미터 넘게 떨어져 있을 만큼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의 삶에 적응해가던 어느 날, 한 보안업체 직원들이 집을 찾아온다. 위험에 노출되어도 도움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회사와 계약할 것을 은근하게 강요하는 그들의 말에 아내와 ‘나’는 왠지 모를 공포를 느낀다. ‘재산과 목숨’을 지켜준다고 말하는 그들이 다른 그 무엇보다 아내와 ‘나’를 불안에 휩싸이게 하는 그 아이러니가, 치매 증세가 심각해진 장인을 둘러싼 이들의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어지는 소설 「호텔 창문」 「홀리데이 홈」 「리코더」를 연달아 읽으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편혜영의 시선이 한층 더 깊고 치밀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죄책감’ ‘수치심’ 등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 「호텔 창문」의 ‘운오’는 19년 전 강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사촌형에게 구조되었고, 사촌형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후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 살아난 운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에 걸맞게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운오는 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형이 자신을 살린 걸 생각하면 언제나 의아한 기분이 들 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홀리데이 홈」도 관계와 감정을 둘러싼 인물의 복잡한 모습을 드러낸다. ‘장소령’이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한 직업군인 ‘이진수’는 소령에서 더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한다. 물품의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일에 가담했다가 그 일이 알려지면서 책임을 질 사람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진수는 식당을 차려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육우를 한우로 속여 판 것이 적발된 뒤 손님이 줄어 결국 아파트를 팔고 전원주택마저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어느 날, 두 남자가 집을 보러 이들을 찾아온다. 그들은 과거 이진수가 저지른 또다른 일에 대해 무언가 아는 듯이 그를 추궁하려 드는데, 그 추궁은 이진수뿐 아니라 이진수 곁에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도 내내 침묵한 장소령을 향해 있는 것만 같다.
「호텔 창문」과 「홀리데이 홈」이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일부러 모른 척하는 인물의 이야기라면 「리코더」는 어떤 감정을 떨쳐낼 수 없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이 쌓인 ‘무영’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수오’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데, 얼마 안 돼 수오가 증발하듯 사라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무영을 의심해 그를 추궁하지만, 경찰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무영과 수오가 고등학교 시절 수련장이 붕괴되는 사고를 함께 겪었다는 사실, 두 사람은 운좋게 구조되었지만 같은 반의 다른 친구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무영은 수오의 실종이 어쩐지 그 일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수오가 말한 ‘마지막 말’을 되새기는 무영의 모습에, 감정을 좀처럼 발설하지 않고 건조하게 서술하던 편혜영의 소설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뭉클함과 애틋함이 고여든다.
이런 변화는 「리코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업이 망하고 치매에 걸려 실종된 남편 때문에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된 ‘미조’가 외국에 사는 딸의 집을 방문하는 이야기인 「플리즈 콜 미」, 고요하게 일상을 이어나가리라고 짐작하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가는 ‘나’가 과거를 돌이키며 시작되는 「좋은 날이 되었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딸을 대학에 보내려고 보험에 드는 등 삶을 반듯하게 꾸려나가기 위해 애쓰던 엄마의 노력이 헝클어지고 마는 모습을 그려낸 「미래의 끝」과 같은 작품들 역시, 미래를 전망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들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마냥 비관 속에 잠겨 있게 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잠시나마 따스하고 부드러운 순간들이 이들에게 분명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급속도로 나빠진 뒤에도 미조와 딸이 서로를 애틋하게 쳐다볼 때(「플리즈 콜 미」), ‘나’가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환하게 웃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좋은 날이 되었네」), ‘동방생명 아줌마’가 혼자 남겨진 ‘나’의 손을 잡고 집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미래의 끝」),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환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사소한 액수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빚처럼, 우리는 삶이 돌이킬 수 없이 어그러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엉킨 매듭의 어떤 부분을 풀어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삶은 처음부터 얽히고 꼬여 앞뒤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 속의 ‘반전’과 ‘비밀’은 트릭에 걸려 넘어진 인물을 둘러싼 상황을 말끔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해결책이 아니다. 반전과 비밀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설사 그것이 풀리고 난 뒤에도 우리는 또다른 반전과 비밀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한 편의 거대한 추리소설과 같다는 사실을 편혜영은 이토록 세련되고 우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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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소설은 정교하고 섬세하게 세공된 열쇠를 닮았다. 필요불가결한 단문들로 이루어진 서사를 좇아 맨 끝에 다다른 뒤에야 독자는 눈을 껌뻑이다 이내 탄식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열쇠와 맞아떨어지는 자물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무표정한 채 꾹 닫혀 있다. 미셸 투르니에에게 자물쇠 없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두 발을 묶어놓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또 열쇠 없는 자물쇠에 대해 ‘해명해야 할 비밀, 밝혀져야 할어둠, 판독해야 할 암호’라고 했다. 편혜영을 읽는 일은 ‘비밀과 어둠과 암호 들’로 빽빽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물음표 열쇠를 손에 꼭쥔 채. _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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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소설은 언제나 처음에 쓰려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자리이거나 전혀 다른 지점에서 멈춘다. 이제는 도약한 자리가 아니라 착지한 자리가 소설이 된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그 낙차가 소설 쓰는 나를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도, 그렇기는 해도 나아진 채로 삶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이 낙차와 실패를 잘 기억해두고 싶다.”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아내나 나나 질문이 많은 사람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 낫다고 여겼다. 대답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듣고만 있으면 그럴 일이 없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했다.(「어쩌면 스무 번」, 10~11쪽)
한번 내지르면 다음에는 수월한 법이다. 악을 쓸수록 세상이 고요하고 온순해지므로 참을 도리가 없다. 비명이 터지기 직전의 기분을 잘 알았다. 가슴에 긴 끈이 걸린 기분. 조금만 캑캑거리면 끈을 쑥 빼낼 수 있을 듯한 기분. 일단 소리가 터지면 괜찮아졌다. 끈이 빠져나오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면 비명을 지르는 건 신발끈을 묶었다 푸는 일만큼이나 간단해진다.(「어쩌면 스무 번」, 22쪽)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들뜨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호텔 창문」, 51쪽)
“사진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남아 있잖아요. 나를 때린 사람도 있고 내가 잘못한 사람도 있고요.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이상해져요.”(「홀리데이 홈」, 83쪽)
그후 수오와 무영은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둘이 있으면 적어도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미안해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 있었다. 죽을까봐 무서웠지만 죽지 않아 더 무섭다는 말 같은 것.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는 이유나 밤에도 불을 켜고 자는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살아났다는 것에 감동받은 적 없지만 적어도 안심은 됐다.(「리코더」, 106쪽)
술은 미조가 온종일 잠을 자든 소리 죽여 울든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잠을 자도록 도왔고 마음껏 울도록 도와주었다. 미조에게 그렇게 해주는 건 술이 유일했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느긋하고 애틋하게 지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플리즈 콜 미」, 121쪽)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게 더께와 나이테를 늘려가는 마을의 보호수처럼 제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외지인의 전입과 내지인의 이탈이 적다보니 평생 같은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지냈다. 누군가를 잘 이해하기보다 오해하고 서운하게 여길 일이 많을 것이다.(「후견」, 151쪽)
정소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법을 진작 터득했다. 일관성을 지키면 되었다. 성적이나 옷차림, 머리 모양, 가방과 신발, 등하교 시간이나 인사하는 태도, 말버릇 등을 언제나 같은 정도로 유지했다. 조금이라도 달라지거나 남과 다르면 질문을 받기 마련이었다. 천편일률적이고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야 어른들은 문제가 없다고 여겨 마음을 놓았고 모범생이라 칭찬했다.(「후견」, 152쪽)
내가 그랬듯이 어머니는 곧 실수를 만회하고 모든 일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는 몰랐을 것이다.(「좋은 날이 되었네」, 185쪽)
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를 따라 웃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며,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 건 다 흘러간다고 말했다.(「좋은 날이 되었네」, 196쪽)
아줌마는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친한 친구 이름이 무엇인지, 친구들과는 무엇을 하고 노는지,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질문에 내가 대답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줌마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구했다.(「미래의 끝」, 213쪽)
시련이 닥치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 도움이 필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미래의 끝」,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