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인 한, 아프고 근심하고 분노하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속수무책 무릎이 꺾이는 삶의 복판에서
김사인 시인이 매일 고르고 살아낸 82편의 시
넉 달간 매일 아침, 시 한 편을 고른 이의 뒷모습으로 시작해본다. 그 넉 달은 북한의 대규모 핵실험과 미국의 트럼프식 리더십이 충돌하던 때였다. 주한 미군이 사드 장비를 배치했고, 중국이 한국을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했던 때였으며,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국을 도발하고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때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파면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던 때라고. 그런 날들을 살며 매일 아침 신문에 실릴 시를 고른다면 당신은 어떤 시들에 손을 뻗을 것인가. 이 책은 속수무책 무릎이 꺾이던 이 시기(2017년 1월~4월), 중견 시인 김사인이 매일 고르고 살아낸 시 82편을 담았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운다. 그럴진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자신이 처한 시대와 뭇 목숨들의 열망에 깊이 사무쳐, 뜨겁게 때로 섧게 울고 부르짖는 자, 요컨대 시대의 온전치 못함을 ‘잘’ 우는 것으로 본분을 삼는 자이다. 그 부근의 일이 이른바 ‘시하는’ 노릇일 터이며, 시인이란 바로 그러하고자 무진 애쓰는 자들, 그와 같고자 제 몸과 넋을 시대의 복판에 내놓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어야 한다. 시인인 한, 아프고 근심하고 분노하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_‘책머리에’에서
『밤에 쓰는 편지』(1987), 『가만히 좋아하는』(2006), 『어린 당나귀 곁에서』(2015)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며 쓰기의 형식으로 “‘시하는’ 노릇”을 이어왔다면, 이 책은 읽기의 형식으로 ‘시하고자’ 했던 시인의 노력일 터이다. ‘시대를 아파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不傷時憤俗非詩也)’ 다산 정약용의 언명을 손에 쥔 채, 시인은 나라 안팎의 격랑을 직시하며 한 편의 시에 나날의 소감을 붙였다.
급할수록 더디다. 지쳐 숨이 넘어갈 때쯤, 마침내 올 것은 온다, 더디게 더디게. 그것이 봄이다.
오면, 봄이 오면, 눈부셔 맞이할 수 없고, 소리가 굳어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 새날, 새봄은 그렇게 온다. 나의 봄도 너의 봄도, 서울만의 봄도 평양만의 봄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봄이어야 한다.
_81쪽
한기가 가시지 않은 2월의 어느 아침, 저자는 이성부 시인의 「봄」을 골랐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라고 시작하는 시. 이 시를 고른 소회에 저자는 “긴급조치의 시대이던 1974년의 작품. 사십 년도 더 전의 시를 마치 오늘의 것인 양 읽게 되는 심정이 기구하다”라고 덧붙였다. 으스스한 봄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낯설거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더더욱 시대의 아픔을 통감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라고 아는 이것이 참 ‘나라’가 맞는가. 내가 ‘시’라고 ‘문학’이라고 알고 있는 이것이 참 ‘문학’은 맞는가. 여기 내가 ‘나’ 맞는가. 아닌 줄을 알고나 있나 나는.
글 속의 분열적 유체이탈이 잠시 어이없다가, 생각할수록 남의 일이 아니어서 웃지 못한다. 내가 없으니 내 일을 남 일로 보고 남 노릇을 내 일인 줄 안다. 큰 것에는 허술하고 작은 것에만 골몰한다.
_77쪽
연암 박지원이 삼십대에 쓴 글 「염재기」의 한 대목을 옮기며 저자가 덧붙이 글이다. 술 취해 자다 깨 자기 자신을 찾는 ‘송욱’의 ‘분열적 유체이탈’이 남의 일인 것만은 아니라 서늘히 깨달은 터. “이백여 년 전에 제기된 이 ‘참된 나’ 화두가 아파, 일세의 문장다운 함축과 여운을 기릴 겨를이 없”어 슬프다 적으며 저자는 한 시기를 또 묵묵히 기록해둔다.
이렇듯 저자는 연구자이자 시인으로서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 가운데 현재의 우리가 거울처럼 들여다봄직한 시들이 곳곳에서 출몰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깊이 생각해왔을 터이고, 그 감식안과 고찰이 이 책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시’를 시늉한 겉모양이 시가 아니라, 안의 사무침이 시인 것
―예와 오늘, 동양과 서양을 비롯, 말과 노래까지 아우른 ‘시’를 정의하는 특별한 기준
상기한 「염재기」와 같이 김사인 시인이 고른 ‘시’의 범주가 폭넓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 될 것이다. 저자는 그날그날 상황에 가장 의미 있을 시를 고르되 한시와 외국 시까지 포함했으며, “시만이 시가 아니라 모든 절실하고 애쓴 언어들은 시에 준한다는 생각”을 더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1919년 청년들이 목청껏 부른 노래 <광복가>에서부터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민국헌법 전문」, 「흥부가 돈타령」, 「소요유」, 신채호의 한시와 릴케, 프랑시스 잠, 자크 프레베르의 시, 그리고 에릭 클랩튼의 <천국의 눈물>까지 한 권에 아우를 수 있었던 이유가 그에 있다. “마음에 사무치는 바가 말과 글을 입으면 그것이 바로 시다. ‘시’를 시늉한 겉모양이 시가 아니라, 안의 사무침이 시인 것이다”라는 저자의 신념과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가 「책머리에」에 밝힌 시 선정 기준을 좀더 살펴보자.
작고 시인들의 글과 시만을 대상으로 삼기로 정했다(죽은 아들에 바친 에릭 클랩튼의 노래 가사가 유일한 예외다). 우리의 시 읽기가 대체로 온고지신에 소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 좋음에 비해 독자들에게 덜 알려져 있거나 오해된 시인과 시를 우선했고, ‘참여’를 표방했던 쪽보다는 전통 서정시 쪽을, 중심부보다 주변부, 서울보다는 지역에서 활동했던 시인들을 좀더 앞세우려 했다. 익히 알려진 시인일수록 가능하면 그의 또다른 면모를 소개하려 애썼다.
‘좋은 언어’가 더 쌓여야 한다
―날마다 시를 읽는다는 것, 그 일은 우리를 어디에 가닿게 하나
시간은 흐르고 오늘도 달력은 넘어가지만 과거가 된다 해서 그것으로 끝인 일은 무엇 하나 없음을 우리는 안다. 행복보다는 불행에, 안정감보다는 불안함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이 시대와 세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삶다움, 사람다움의 고귀한 가치를 찾아내 밝히려는 자, 그를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지. 언어의 쓸모를 확인하고 메마른 일상의 소통 양식에 영향을 끼치는 문학을 우리는 시라 부르는 것이 아닐지. 쓰고 참담한 소식들 가운데 김사인 시인이 ‘시하기’를 통해 지향한 곳은 어디였을까.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아가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고 기다려보세요”로 시작하는 시, 신동엽의 「좋은 언어」를 고른 날 덧붙인 글에서 엿볼 수 있으리라.
눌변이지만 진심인 염려의 말, 따뜻한 믿음의 말,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상대가 좋아하니 나도 따라 기분이 좋은 마음의 말, 연민의 말. ‘좋은 언어’가 더 쌓여야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좋은 세상이 온다고 이 시는 간곡하게 이른다. 1970년 4월 발표된 신동엽 시인의 유작.
_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