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버지를 죽였어.”
미국 전역을 공포에 빠트린 희대의 살인사건,
리지 보든 미스터리의 문학적 재해석!
2018 여성소설상 후보 | 2019 더블린문학상 후보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살인사건 #실화 #리지보든 #소설데뷔작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의 한 저택에서 앤드루 보든과 애비 보든 부부가 도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 범행 자체의 잔혹성에 더해 부부의 둘째 딸인 리지 보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결국 리지는 ‘여성이 이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는 그로부터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무성한 소문과 추측을 낳은 이 미제 사건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리지 보든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법의 처벌을 벗어났으나, 그녀가 수십 번의 도끼질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의심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리지는 정말로 이 사건의 진범일까? 그렇다면 대체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리지는 왜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부모를 살해했을까?
2017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로 데뷔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세라 슈밋은 사건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 나름의 가설을 가지고 있는 이 유명한 살인 미스터리의 한가운데로 과감히 뛰어든다. 소설은 리지와 그녀의 언니 에마, 가정부 브리짓, 그리고 보든 자매의 외삼촌이 고용한 해결사 벤저민, 이렇게 네 명의 일인칭시점으로 사건 전날과 당일에 일어난 일들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벤저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실존했던 사람들이고 묘사된 일화들 또한 공판 증언이나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탐정’의 역할을 자처하지는 않는다. 차가운 눈으로 현장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현장의 일부가 되어 당시의 풍경을 상상하고, 각자의 이유로 분노와 절망에 빠진 인물들의 뒤틀린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그 집요하고 강렬한 시선은 보든가의 음울한 저택으로 무자비하게 들이치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처럼, 인간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까지 파고든다. 또한 온갖 감각적 심상으로 가득한 섬세하고 치밀한 언어는 화자들이 체험한 불길한 분위기와 처참한 광경을 바람 한 점까지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꿈이라는 걸 알아차려도 깨어날 수 없는 끈질긴 악몽처럼, 그 선명한 묘사는 읽는 이의 의식 속에 끈적하게 스며든다.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밀려드는 열기와 땀에 젖은 체취에 몸을 움츠리거나, 뜨거운 공기를 머금고 팽창하는 집의 신음소리에 불현듯 뒤를 돌아보게 될 때까지.
소름 끼치도록 섬세하게 되살려낸 그 참혹한 날의 공기,
숨막히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누군가가 다시 도끼를 든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어.” 1892년 8월 4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그날, 리지는 아버지가 피범벅이 된 채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정부 브리짓을 부른다. 사색이 된 브리짓은 의사를 부르러 헐레벌떡 뛰어나가고, 곧 도착한 보든 가족의 주치의는 끔찍하게 살해된 앤드루 보든을 보고 즉시 경찰을 부른다. 금세 보든가 저택은 수많은 경찰과 집 앞에 모여든 구경꾼들로 아수라장이 된다. 경찰의 끝없는 질문 공세와 집안 가득한 소음, 숨막히는 더위에 둘러싸인 리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친척 병문안을 간 미시즈 보든은 언제 돌아올까? 그런데 별안간 위층 손님방에서 비명이 터진다. 그곳에서 역시나 참혹하게 살해된 새어머니 애비 보든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더해가는 열기와 혼란 속에서, 의사가 처방한 안정제의 몽롱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리지는 친구네 집에 가 있는 언니 에마를 떠올린다. 그녀를 이 끔찍한 곳에 혼자 내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린 에마. 언니가 돌아오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언제나처럼 언니가 모두 다 해결해줄 거라고, 그녀는 되뇌인다.
에마는 잠시마나 답답한 보든가를 떠나 리지도 아버지도 애비도 없는 곳에서 자유를 즐기던 참이었다. 어린 동생 리지를 끝까지 잘 돌보겠다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끊임없이 희생을 강요하는 인색한 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마흔 살이 넘도록 집과 가족에 매여 있었다. 동생에게 허락된 해외여행조차도 그녀에게는 꿈꿀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러나 친구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자유의 기쁨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침내 감옥 같은 폴리버의 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러나 그 부푼 꿈은 집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와 함께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아버지가 다침. 미시즈 보든 실종. 끔찍한 사고. 돌아오길.’ 아, 리지는, 이 진저리나는 가족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보든가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은 에마뿐만이 아니었다. 몇 년째 보든가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브리짓은 돈을 모아 아일랜드에 있는 가족 곁으로 돌아갈 날만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는 중이었다. 늘 짜증스럽고 심술궂은 리지와 툭하면 리지에게 손찌검을 하는 미스터 보든, 항상 불행에 찌들어 있는 미시즈 보든, 그 모두를 견디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이 불길한 집에서는 언젠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어서 이곳을 영원히 떠날 수 있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그녀의 예감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벤저민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길거리를 떠돌며 험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 탓이니까. 어머니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 벤저민은 평생 깊고 뒤틀린 복수심을 품고 살아왔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엮이게 된 존이라는 남자가 자기 조카들을 위해 집안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선뜻 응했던 건 그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기꺼이 단죄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추악한 아버지. 그러나 앤드루 보든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때를 기다리던 그는 곧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앤드루에게 거대한 분노를 품은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도끼를 집어들었다는 것을.
가족이라는 밀실에서 태어난, 욕망이라는 괴물
소설 뒤에 수록된 ‘작가 노트’에서 세라 슈밋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기나긴 악몽 같은 이야기답게 이 작품은 실제로 작가의 악몽에서 시작되었다. 2005년 슈밋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보든가 살인사건을 다룬 소책자를 발견했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니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엔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책에 실린 리지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 이후, 리지가 계속 꿈에 나타났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슈밋은 리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재판 기록과 당시의 신문기사 등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며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소설은 잘 풀리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 두 가지 버전의 원고를 폐기한 후에 깨달았다. “소설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모든 일이 시작된 지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폴리버까지 먼길을 날아 보든가 저택으로, 이제 민박집 겸 리지 보든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악명 높은 범죄 현장으로 향했다.
“이 집은 실제로 존재하는 집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꿈꾸었던 버전의 세컨드 스트리트 92번지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가 서로의 안에서 숨쉬며 살고 있었다. 나는 리지가 그 집에서 늘 숨막혀하며 살았으리라 생각했기에 그녀를 인형의 집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자신에게는 육신이 너무 작다고, 주어진 가족과 도시와 삶보다 자신이 더 크게 성장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리지가 살던 인형의 집에 들어와 있었기에, 벽과 천장이 조여들며 나를 압박해왔고 식은땀이 흘렀다. 마치 유령에게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문 421쪽
백여 년 전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복원되어 있는 그 음산한 저택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작가는 민박집 주인과 방문객들을 통해 흥미로운 정보를 많이 얻었다. 그러나 가장 큰 성과는, “보든 가족이 기지개를 펴고 숨을 쉬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살고 죽었던 공간”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가 소설 속에 묘사한 보든가의 저택은 그저 범죄 현장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쌓인 욕망과 애증과 원망과 분노가 뒤섞이며 끓어오르는 감정의 용광로이자, 19세기의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자유를 간절히 바라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보든가의 여성들은 숨통을 조여오는 고요 속에서 서로를 더욱 잔인하게 옭아맨다. 그들에게 이 집은 문이 있어도 도망칠 수 없는 밀실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뒤틀린 감정으로 펄펄 끓는 그 밀폐된 용광로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도끼가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이 넌지시 제시하는 사건의 윤곽이 단 하나의 궁극적인 진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진실이기는 할 것이다. 때로 어떤 사건에는 여러 겹의 진실이, 시각을 달리해야만 드러나는 다면적인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추천의 말
범죄 현장에 스민 여름의 열기처럼 불안감을 자극하는 눈부신 데뷔작. 살인사건과 와해된 가족, 그 각각을 다루는 책들은 있지만 두 가지 주제를 이토록 매끄럽게 엮어낸 소설은 보기 드물다. 많은 질문에 답하고, 그만큼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 커커스 리뷰
철저한 자료 조사와 대담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의 불꽃이 탁탁 타오른다. 슈밋이 그려낸 리지는 복합적이면서도 떨쳐내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그 깊이 있는 심리적 묘사는 여성이—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독자의 선입견에 의문을 던진다. 불편하면서도 마음을 휘어잡는, 사랑과 죽음과 해소되지 않은 슬픔이 평생에 걸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뛰어난 소설. 업저버
우리는 모두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를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호러 스토리 중 하나인 이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세라 슈밋의 탁월한 데뷔작을 통해 리지 보든의 이야기는 무자비한 악행에서 결함 있는 현실로 탈바꿈한다.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소설가, 『고아 열차』)
으스스하고 흥미진진하다. 세라 슈밋은 리지 보든과 그 가족의 끔찍하고 비틀린 이야기에 완전한 생명을 불어넣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폴라 호킨스(소설가, 『걸 온 더 트레인』)
잊히지 않을 데뷔작. 사건의 범인을 쫓는 소설로서도, 범행의 동기를 쫓는 소설로서도, 역사소설로서도 모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새롭고 탁월한 재능이 탄생했다. 조마조마한 호러와 고요하면서도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이 뒤섞인, 밤을 새워 끝을 보게 만드는 소설. 북리스트
리지 보든은 어쩌면 초법적인 여성의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라 슈밋은 여든한 번의 도끼질과 그것에 의해 희생된 부부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혼을 빼놓는 소설을 써냈다. 억압적이고 무료한 가정 생활, 뒤틀린 자매애, 집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헛된 꿈을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 정확히 그려낸다. 유혈이 낭자한 현란한 악몽 같은 이 책은 놀랄 만한 데뷔작이다. 아이리시 타임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범죄 중 하나를 소설화한 이 작품은 효과적으로 공포를 유발하고 밀실공포증을 일으키는 악몽 같은 이야기의 집약체다. 비틀린 가족의 역기능을 거의 환각을 일으킬 만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 긴장감 넘치는 심리학적 탐구이자 마음을 틀어쥐는 뛰어난 소설. 탬파베이 타임스
보든 가족이 도끼 살인에 의해, 그리고 더 미묘한 수단에 의해 몰락하는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다. 슈밋은 인물들 각각의 내면에 들어앉아, 섬뜩할 만큼 편안한 직관력으로 그들의 불안과 사악함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의 모든 것이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독자를 홀린다. 소재가 리지 보든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름 끼치고 통렬한 작품. USA 투데이
슈밋은 그 중심에 무언가 부패한 것을 품고 있는 한 가정의 초상을 풍부하고 자신감 넘치는 필치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탄탄한 데뷔작은 오스트레일리아 문학계에 독창적이고 강렬한 목소리의 등장을 알리며, 작가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가디언
이 소설은 살인이 일어난 날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광기어린 악몽 같다. 슈밋은 단순한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감각에 대한 소설을 써냈다. 거의 모든 문장에 후각, 청각, 미각과 같은 감각적 묘사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그러한 감각의 포화를 통해 뇌 속으로 스며들어, 소름 끼치는 불편함으로 당신을 감싼다. 마음을 동요시키는 놀랍도록 탁월한 작품. 북 라이엇
▶ 책 속에서
어느 날 어떤 여자가 센강으로 뛰어들어 하얀 돌로 만든 아치형 다리 아래를, 생미셸 다리 아래를 한 마리 백조처럼 헤엄쳐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만들어낸 한 편의 오페라 같은 갖가지 소리.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둥둥 떠 있다가 사라졌다. 그 여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방식에 나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에마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여자가 진정으로 마음을 먹으면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본문 34쪽
“슬프게도 인생은 가끔 그렇게 굴러가. 원할 때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이 말의 어떤 부분은 그 즉시 진실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그녀가 미웠다. 본문 47∼48쪽
나는 공상을 집어치우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며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동생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뭔가가,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은 내게서 사라졌다. 본문 171쪽
해답을 원하는 에마의 흉측한 욕망에 내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녀의 살에 이를 박고 그녀를 먹어치워 내 삶에서 없애버리고 싶어졌고, 그녀의 마음속으로 쳐들어가 나에 대한 생각을 모두 솎아내고 싶어졌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다는 생각, 내가 너무 비밀이 많다는 생각, 내가 못됐다는 생각, 내가, 내가. 그녀의 고약함이 내 피부를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내게 무(無)가 되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는 그 작은 죽음들. 본문 280∼281쪽
우리가 각각 열네 살과 네 살이었을 때, 리지와 나는 아버지가 몸속에 온 세상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그 뱃속의 중심에는 비밀의 세계로 가는 길을 알려줄 지도가 있다고 믿었다. 그 세계에는 몸을 숨기고 기다릴 수 있는 모퉁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막의 신기루, 사탕으로 만든 탁자 위의 탁자, 설탕이 든 음료수, 나무와 이상한 생물이 가득한 넓은 도랑, 고대 유적지, 어머니가 들어 있을 터였다. 그러다 열다섯 살이 되자 나는 아버지가 더이상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어른처럼 쉽게 실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품을 수 없었다. 본문 367쪽
내가 살았던 삶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기였던 나를 안아주었던 어른은 모두 죽었고 이제 아무도 나를 그렇게 안아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동생을 보았고, 피를 보았다. 심장 안에 도사린 그 비통함을. 본문 372∼373쪽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리고, 그가 생전에 중얼거린 모든 말을 잊는 날이 올 것이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와 어머니를 보여주었던 날, 그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 우리가 어머니를 필요로 할 때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망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본문 3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