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사는 공격적이지 못한 소시민의
위로받을 수 없는 불안과 분노의 피해의식을 본다.” _박완서(소설가)
단정한 문장을 뚫고 터져나오는 야성적인 목소리
14년 만에 새로이 펴내는 초기 편혜영 세계의 압축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서운 존재감을 발휘하며 쉼없이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편혜영의 두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를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인다. “만약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들 속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 소설 미학의 낯선 차원을 만나는 두근거리는 모험이 될 것이다”(문학평론가 이광호)라는 평을 받은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7)과 “현대사회의 익명성과 인간소외에 대한 고발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만의 시각과 어조로 그 주제를 완전히 환골탈태했다”라는 평과 함께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2011) 사이에 놓인 『사육장 쪽으로』는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집요하게 묘사하며 작가의 시작을 알린 편혜영의 작품세계가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드는 쪽으로 서서히 변화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편혜영의 소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집이다. 더구나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아직까지 소설 쓰는 사람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그 시절을 지나온 덕분”이라고 밝히고 있듯, 이 소설집이 작가로서의 일종의 터닝 포인트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사육장 쪽으로』는 지금까지 펴낸 11권의 책들 중에서도 특히 독보적인 무게감을 드러낸다. 함께 출간되는 신작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과 함께 우리는 편혜영의 초기 세계와 아울러 그 세계에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른 궤적을 따라가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길이 끝날 거였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려가면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
그는 그들이 닿는 곳이 사육장 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은 “매일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기 위해서 같은 시각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비슷한 시각에 잠자리”(「사육장 쪽으로」, 39쪽)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일상이 한순간 어그러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일상을 망가뜨리는 것은 갑작스레 도로 위로 나타난 ‘트레일러’이거나(「소풍」) 언제든 집으로 쳐들어올 수 있음을 경고하는 ‘계고장’이며(「사육장 쪽으로」), 중요한 서류가 담긴 가방이 분실되는 사건이기도 하다(「분실물」). 이러한 변화 앞에서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뒤에서 트레일러가 덮칠 듯 따라붙는 상황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도로 위를 계속해서 달려야 하고(「소풍」), 완전히 파산하여 돈을 버는 족족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는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차에 올라타야 한다(「사육장 쪽으로」).
그리고 이러한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한편에 자리해 있는 것은 도시에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야생성’이다. 동물원에서 시베리아산 늑대가 사라진 뒤 늑대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밤의 사냥에 나서면서 이상한 활기를 되찾는 도시나(「동물원의 탄생」) “죽은 채 가라앉은 들쥐며 들고양이, 소문대로라면 사람의 사체가 한데 섞여 냄새를 풍기”는(「밤의 공사」, 91쪽) 습지는 그 자체 향기와 악취가, 불빛과 어둠이, 사람과 동물이 뒤섞인 채로 공존하는 공간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편혜영 특유의 빈틈없는 문장으로 담아낸 이 소설들은 안개가 깔린 도로를 겁없이 질주하는 듯한 맹렬함으로 우리를 긴장과 몰입의 세계로 몰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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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의 전원주택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가장에게 어느 날 닥친, 가족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사건 사고는 마치 내가 직면한 위기처럼 리얼하게 다가온다. 사육장에서 탈출한 개에게 물린 아이를 데리고 차를 모는 병원 방향이 사육장 쪽이라는 것, 그가 운전해가는 신작로와 고속도로에서 그를 앞지르거나 스치는 트럭, 트레일러 등 큰 기계에 대한 그의 무서움증에서 우리는 현대사회를 사는 공격적이지 못한 소시민의 위로받을 수 없는 불안과 분노와 피해의식을 본다. _박완서(소설가)
편혜영의 단편들은 경제적으로 제어된 서술, 정교한 디테일을 통한 암시, 통일된 인상의 창출 등과 같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규범을 정확하게 습득한 바탕 위에 쓰인 것이다. 표제작은 물론 그 밖의 단편 모두 현대의 삶에 대한 은유를 이루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박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상황의 핵심은 겉으로는 정연한 듯한 인간세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어느 순간 인간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출현에 있다. 편혜영은 일상생활의 조건을 이루는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의 질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집합적 무의식의 심층을 냉혹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내부, 그 암흑의 핵심을 향해 이토록 깊이 시추를 내린 작가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다. _한국일보문학상 심사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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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소설을 묶으면서, 작품을 다 쓰고 나면 한 시절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썼다.
시절을 잃은 기분으로 썼던 소설을 시간이 지나 되새기자니 무척 겸연쩍지만 지금의 나보다 용감하고 무모했던 나에게, 이 책에 담긴 소설로 그 시절을 건너와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썼다.
아직까지 소설 쓰는 사람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그 시절을 지나온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안개가 모든 것을 가려줄 것이다. 이런 안개라면 발가벗어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소풍」, 15~16쪽)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해야만 했다. 파산 통보를 받은 날까지 시간에 맞춰 서둘러 출근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돈을 벌어봤자 그들에게 다 빼앗길 테지만 일상을 지키는 것은 중요했다.(「사육장 쪽으로」, 42쪽)
높이 솟은 건물 그림자가 그들의 어깨 위로 찬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내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고개를 뒤로 젖혀도 고층건물에 가려진 밤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둥글고 기다란 콘크리트 철창에 갇힌 느낌이었다.(「동물원의 탄생」, 82쪽)
그들은 박봉을 견뎌야 했다. 단장의 강압적인 지시와 까다로운 규율도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자신의 웃는 얼굴을 견뎌야 했다.(「퍼레이드」, 122쪽)
그는 불현듯 자신이 아이에 대해 아는 점이라고는 이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되는 동안 그가 한 일은 회사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금요일의 안부인사」, 156쪽)
그가 생각하기에 아파트는 이상적인 주거공간이었다. 아파트는 모두가 같다고 상상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다르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모든 게 똑같아서 어디를 가나 낯설지 않았다. 박은 현대에 있어 개성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다르면 거부감을 주지만 지나치게 같으면 경박해 보였다.(「금요일의 안부인사」, 161~162쪽)
우연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노력을 상관하지 않았다.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부의 정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우연만큼 민주적인 것은 없었다.(「금요일의 안부인사」, 163쪽)
되풀이되는 일상은 박에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결국 자신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처음부터 그런 게 있기나 했는지, 이다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시간에 맞춰 일을 시작하고 식욕과 관계없이 순서에 따라 밥을 먹었으며 산적해 있는 잡다한 일을 처리하려고 시간을 쪼갰다.(「분실물」, 187쪽)
그는 자신의 이력으로는 도시에 있는 직장에 취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이력서를 보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변두리의 구직자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신도시가 완공되면 그가 사는 곳도 도시의 일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반지하방을 전전하는 생활이 나아질 리 없으리라는 생각에 치욕스럽기도 했다. 그게 뭐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치욕이나 위안이 인생을 바꾸지 못했다.(「첫번째 기념일」, 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