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마저 ‘소크라테스’인 고전형 인간에게 시작된 죽음이라는 여정
죽음 너머로 가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의 삶 가운데 어느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
고전어 교사를 그만두고 여행안내서를 써서 밥벌이를 하는 뮈서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암스테르담의 집에서 잠들었으나 다음날 눈을 뜬 곳은 리스본의 어느 호텔방임을 깨닫는다. 이 불가해한 상황이 삶에서 죽음 너머로 가는 여행이라고 예감하지만, 호텔방이 이십 년 전 동료 교사 마리아와 불륜을 저질렀던 곳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일 또한 가능함을 알아차린다. 라틴어를 숭배하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사랑하는 고전형 인간이자 외모마저 판박이라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답게 이내 그는 자기 육체와 영혼이 지금 합치된 상태인지, 시공간의 선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고민하다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를 차례차례 되짚어본다. 마리아와 거닐었던 리스본의 장소들, 고전의 아름다움을 유일하게 이해했던 명석한 제자 리사, 무례한 동료 교사이자 마리아의 남편인 아런트, 이들 각자에게 불행한 운명으로 작용했던 과거 그날의 사건…… 거부할 수 없는 기억들의 연쇄 속에서, 뮈서르트는 다시 암스테르담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호텔방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한다.
죽음이란 무無라고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모든 사고가 멈춰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건 맞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고와 생각과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9p)
당신이 불사의 존재라면 죽어야 할 운명의 존재들이 뿜어내는 악취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미래의 사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불, 물, 사자 그리고 뱀으로 연달아 변신했다.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신과 인간의 차이점이다. 신은 스스로 변신할 수 있지만 인간은 변신될 수 있을 뿐이다. (15p)
뮈서르트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여섯 명의 여행객과 함께 리스본의 벨렝에서 출발해 브라질의 벨렝으로 가는 신비로운 항해에 동참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배가 지나는 물길은 저승의 강 스틱스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두려움이 일 정도로 밤하늘에는 별이 그득한 와중에 여전히 과거를 회상하고 사유하는 일은 가능하다. 스페인인 남자아이, 이탈리아인 신부, 중국인 교수, 프랑스인 비행사, 미국인 기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로 이뤄진 일행은 각자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간에 대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결정한 사람들과 달리 뮈서르트는 확신이 없고,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를 계속 곱씹는다. 자기 이야기를 마치고 흡족함을 느낀 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이제 뮈서르트의 차례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영감을 줄 어떤 형상이 저멀리서 손짓하고, 그제야 뮈서르트는 확신을 얻는다. 드디어 들려줄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영원한 문학의 주제 ‘죽음’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향연
오감을 자극하고 지적 포만감을 안기는 노터봄 스타일의 걸작
『계속되는 이야기』는 짧은 분량에 심도한 주제와 사유할 거리를 밀도 높게 함축하고 있다. 뮈서르트는 죽음의 과정으로 여겨지는 불가해한 상황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해 자신이 정신적 안식처로 삼고 있는 고전, 회화, 음악 등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신과 인간, 고대와 현대, 고전형 인간과 현대형 인간이 충돌하며 대비와 긴장을 자아내고, 과거에 머물러 살며 꽉 막힌 성격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해, 불멸의 철학적 주제인 육신과 영혼·시간과 순환·사랑과 아름다움 등에 대해 사유해볼 기회를 준다.
내게 오리온자리는 『오디세이아』 제9권에 나오는 유배자,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여명의 여신의 연인일 뿐이었다. 나는 그의 별들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 “그럼 무식하게 사시라고요.” / 곁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녀는 없다. / “세상을 당신 방식대로 인식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물었다. “숫자로 생각을 분쇄해버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놀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100p)
며칠간이라는 말을 하고 보니 그게 얼마나 모호하게 들리는지 알겠다.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언가를 잘 측정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겠다. 인간은 측정하는 일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삶의 공간은 너무나 비어 있고, 너무나 열려 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자신을 붙들어두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고안해냈다. 이름, 시간, 치수, 이야기 등등. (87p)
노터봄은 많은 시간을 여행자이자 이방인으로 살며 여행문학의 심오한 지평을 연 작가로 일컬어지는 만큼, 이 작품 곳곳에서도 뮈서르트가 눈을 뜬 리스본을 중심으로 짤막한 여행 단상으로도 읽힐 수 있는 문장들을 선물처럼 만날 수 있다. 이런 장치는 여행 역시 시공간과 차원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주제에 부합함을 환기하는 동시에, 밀도 높은 작품에 또다른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애써도 옆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가렛트가의 카페 브라질레이라 앞 페소아 동상 옆의 의자가 비어 있듯이. 적어도 페소아의 외로움은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누군가 그의 옆에 있었다면 그의 다른 세 자아 중 하나인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검은 가죽커버와 구리단추가 달린 등받이 높은 의자들, 동자이음어처럼 수시로 변형되는 거울들, 성벽 위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그리스 신전들, 그리고 A. ROMERO라 쓰인 육중한 시계가 걸린 작은 홀에 앉아 그와 함께 말없이 흰 찻잔에 담긴 검고 달콤한 액체를 마시는 손님인 양 시간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76p)
뮈서르트가 맞이한 미스터리한 아침, 고전과 현대의 대비, 경계와 관계에 대한 고찰 등을 통해 결론적으로 이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는 ‘죽음’이다. 노터봄은 한 인물 앞에 들이닥친 최후의 순간,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순간, 영원한 인류의 관심사이자 문학의 주제인 죽음을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독자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지적 포만감을 안기는 걸작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