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은 어디서 왔나요”
타자를 보듬는 시선으로 가늠하는
이해에 다다르는 정확한 거리
문학동네시인선 150번째 시집으로 강신애 시인의 네번째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를 펴낸다. 첫 시집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에서부터 서로 다른 존재와 화해하며 생명의 중심을 채우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시인. 이번 시집에서는 먼 곳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간절한 접촉의 열망에 이끌려 이윽고 걸음을 옮기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그리움의 거리로 세상을 가늠하는 그는 시를 통해 낯선 이와의 이해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먼나무가 걸어왔다
옹이진 무릎에서 방출되는
빛
나무는 멀어지면서
동시에 다가왔다
내 앞 어두운 나무들은
가파르게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투명하게
사선으로 움직이는 소로
찌르는 향
재빨리 숨는 노루, 새와 벌레와
부러진 흙빛 둥치들까지
알 수 없는 기체가 얽힌 뿌리의 세계
―「움직이는 숲」 부분
가장 처음에 놓인 이 시에서 우리는 타자를 향한 시인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걸어오는 ‘먼나무’를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 그것이 무기력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멀어지거나 다가오는 하나의 존재로 인식한다. 또한 그 존재가 ‘멀어지면서 동시에 다가’온다는 표현은, 눈에 어른거리도록 먼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나’의 타자에 대한 열망을 짐작케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멀리 있을 때에야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 사물과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때로 연인은 곁에 있어도 아득히 멀게 느껴지고, 어떤 참혹은 아무리 먼 곳의 일이라도 우리를 소름끼치게 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자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그리움으로 세상을 가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 그토록 바라보지만 ‘가파르게 뒤로 물러나는’ 나무가 하필 상록교목 중 하나인 먼나무인 것은 어쩐지 절묘하다.
시집의 해설을 쓴 박동억 평론가는 이와 같은 시선에 대해 “역원근법”이라는 표현을 제안한다. 「움직이는 숲」에서 움직인 것이 사람이 아니라 나무였던 것처럼, 풍경화가의 그림조차 풍경화가 아니라 “전신에 퍼진 낱낱의 내력에서 흘러나온”(「터너의 원소」)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화가가 어떤 물감을 택하고 어떤 원근법을 택하는지는 순간의 사건이나 감정이 아닌 일생에 의해 결정되며, 시는 그 시인이 그린 그리움의 점근선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강신애의 그리움은 어떤 점근선을 그리고 있을까? 그의 시를 읽다보면, 무미건조한 일상 안에서 타자의 낯설 얼굴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진다. 그와 같은 시선은 아파트숲 사이 느닷없이 나타난 러버 덕을 바라볼 때도(“매캐하고 이상한 도시를/ 신성한 소인국으로 바꾸어놓지// 일 톤의 샛노란 곡면에 출렁이는 호숫가 사람들은/ 유년의 환영으로 둥둥 떠오르지” 「러버 덕」), 요가를 가르치는 유튜브 스타의 영상을 볼 때도(“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인도하는 너// 네가 낙타가 되면/ 나도 낙타가 되고// 네가 쟁기가 되면/ 나도 쟁기가 되지” 「요가 소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벗어나고자 하는 완고한 일상, 그곳에서 눈 돌리는 낯선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소홀히 대하고 사소하게 여기는 타자들이다. 시인이 「깃털 모으는 남자」에서 “지갑을 열자/ 깃털이 수북하다”라고 쓴 것처럼, 이 시집에서 사람과 사람이 거래하는 수단은 화폐가 아니라 깃털이다. 깃털로 “사과의 마음 하나쯤 살 수 있겠지”라고 말하듯, 이 시집에서 거래되는 열매는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한 단어, 한 단어는 하나의 마음이 타자의 마음으로 향하기 위해 지불하는 한 번의 날갯짓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한 사람의 마음을 감히 알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침대에 길게 늘어진 어머니는/ 뒷모습이 앞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포기를 요구했다”라고 표현할 때 시인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그저 바라보거나 침묵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시 「클라인의 병」에서 표현하듯,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은 ‘슬픈 자각몽’처럼 삶을 침범하지만, “당신은 이제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확고한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이해는 타자의 고통이나 현전에 관한 일이 아니다. 이해는 다만 그리움에 사로잡힌 자신을 견디는 일이다. 시인은 그 길이 끝이 없는 막막한 걸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견디며 머뭇거리지 않고 타자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의 시선, ‘시’라는 이름의 그 시선을 좇으며 우리 또한 이해에 다다르는 거리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