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장강명 작가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2015)은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안보윤, 정한아, 황현진 등의 뛰어난 작가들이 처음 이름을 알린 문학동네작가상의 제20회 수상작이다.
기자생활로 다져진 기민한 현실감각에 바탕해 『표백』 『열광금지, 에바로드』 『호모도미난스』 『한국이 싫어서』 등과 같은 작품들을 선보이며 주목받아온 작가의 전작들과는 사뭇 달리,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부딪치고 어울리는 하나의 세계”(심사평)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면서 신선한 충격을 안긴 바 있다. 한 심사위원은 “심사를 한다는 기분도 느끼지 못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얼결에 살인을 저지른 남자, 그 남자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여자, 그리고 그 남자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 한 어머니, 세 인물의 목소리가 겹겹이 얽히는 가운데,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가장 슬픈 거짓말을 준비한다. 그 끝에 남는 것은 죄와 속죄의 본질에 대한, 그리고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매혹적인 질문이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기존 표지가 파스텔톤의 이미지로 소설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리커버판의 표지는 선명한 달과 패턴화된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인물의 내면과 정서, 그리고 소설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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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패턴/시작/표절 007
순서/보람/개성 017
작두/홍콩/교지 024
노선/모범/소금 034
추억/나루/접대 046
담배/가명/교탁 055
여상/가면/로션 065
나합/칼럼/학기 074
일벌/인형/책장 081
양봉/손돌/수조 096
안대/반찬/숙제 106
의혹/케샤/필명 118
합의/자갈/광자 130
복권/유서/너는 누구였어? 142
나무/호텔/소원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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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설을 쓰는 첫번째 이유가 돈인 것은 아닙니다.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인생을 걸고 어떤 일을 할 때, 세번째 이유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 밥벌이의 싸움을 피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두번째 전장을 가벼이 여긴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계속 싸워서 글과 돈을 열심히 벌어보겠습니다. 쓰고 싶은 소설을 다 써서 더이상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겠습니다. _‘수상 소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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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87쪽)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140쪽)
나한테 남은 문제는 이거였어. 네가 이 마지막 때문에 우리 관계를 온통 불행했던 것으로, 비극적인 것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보통의 시간 순서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사와 결말을 중시하잖아.(144쪽)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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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패턴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 패턴 밖으로 나갈 것인가라는 매혹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 어려운 질문에 맞서 훌륭히 싸워낸 서사였다. _강지희(문학평론가)
독보적인 작품이었다. 별로 심사를 한다는 기분도 느끼지 못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_권희철(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
함께 심사를 했던 젊은 평론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고 했다. 다시 읽기 전에 나는 촌스럽게 울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밑줄을 죽죽 그으면서 읽었다. _김도연(소설가)
죄와 속죄, 반성과 용서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엉킨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속죄란 가능하며 어떤 것이 진정한 속죄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그에 대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소설적 응답을 행한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국문과 교수)
제각기 다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 세 인물의 서사를 정교하게 뒤섞어놓는다. 구상이 절묘하고 거침이 없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문장 역시 간결하고 정확하다. _신수정(문학평론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장편소설의 한 전형을 제대로 보여준 것만 같아, 이 땅에서 함께 소설을 쓰고 있는 한 사람의 마음에 작은 질투와 커다란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형이란, 바로 ‘사건 이후의 사건’일 것이다. 장편의 핵심은 어쩌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이 야기한 그뒤의 ‘사건’에 있을 것이다. _이기호(소설가,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현실을 직시하는 충실함에 둥지를 틀었다. 그 둥지 안에서 알을 깨고 부화한 것은 뭉클한 감동이다. 이 작가의 둥지 안에는 이야기를 품은 어린 새들이 더 많이 들어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보여줄 힘찬 날갯짓이 너무나 궁금하다. _천운영(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