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 낙태는 모두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달렸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266일간의 임신 탐구기
D라인 패션 아이템처럼 임신부 같지 않은 몸매를 치켜세우는 콘텐츠나 태아 보험, 제대혈 보관 등 태아를 위한 다양한 상품이 소개되고 방송이나 인터넷 등에서 임신 관련 정보를 곧바로 찾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임신 후 266일간 격변하는 여성의 몸과 심리에 대한 과학적 정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임신한 자신의 몸이 낯설어 이것저것 알아봐도 정확한 정보는 쉽게 찾기 어렵고 “임신하면 원래 다 그래”처럼 눙치는 이야기만 부지기수로 돌아온다. 숙취로 고생하던 어느 날 아침,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저자 앤절라 가브스도 그랬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경악해 ‘내가 배아를 알코올에 절인 건가?’ 초조해하며 구글링을 해보지만, 알게 된 건 ‘엄마가 뭘 먹든 아이도 함께 먹는 셈이다’라는 주장과 ‘임신한 줄 모르고 술이나 약을 먹은 건 괜찮다’라는 상반된 주장이 공존한다는 사실이었다. 임신에 관한 모순되거나 허황된 정보를 거듭 접한 저자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임신한 여성의 몸에 관한 제대로 된 답을 직접 찾아나선다.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다』는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과학적 정보와 여성들 간의 연대로써 임신, 출산, 육아 과정을 직접 겪으며 헤쳐나가는 생생한 임신 보고서다. 성생활과 임신에 관한 내밀한 일화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거나 주변 여성들의 임신 경험을 담담하게 소개하면서도,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의 인식과 과학적 사실들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외면당하는 사회에서 ‘당신만 유별나게’ 몸의 변화로 당혹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유산과 낙태는 모든 여성에게 낯설고 힘든 경험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화산이다.” 미국의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은 이렇게 썼다.
“우리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우리의 진실이자 인간 보편의 진실로 제시할 때 모든 지도가 변한다. 그 지도에는 새로운 산맥이 솟아 있다.”_25쪽
“임신했는데 그래도 돼요?”: 여성의 몸은 ‘공공재’가 아니다
타인의 사생활 침해는 타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행동이라는 인식은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임신한 여성은 아무렇지 않게 사생활을 간섭당한다. 여성은 당연히 출산-기계가 아님에도, 사회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 하며 ‘행복한 임산부’ ‘좋은 엄마’의 이미지를 선전한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재생산을 위한 ‘공공재’가 아니라 온전히 ‘주체적인 개인’의 것이다. 출산과 낙태에 대한 결정부터 자연분만(질식분만)을 할지 모유수유를 할지까지 모두 임신한 여성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배가 불러올수록 ‘하지 마라’와 ‘해라’의 목록이 길어지지만 저자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운다. 임산부에게 해롭다고 알려져 금지하는 알코올과 약물 복용의 경우 윤리적으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어느 수준까지를 스스로 감당할지 임신한 여성 스스로가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신중에 카페인과 알코올을 멀리하고, 체중을 과하게 늘리지 않고, 이른바 자연분만을 준비하고, 적어도 1년은 모유수유를 하고, 임신과 출산 과정 내내 행복감으로 빛난다면 당신은 ‘좋은 엄마’다. 임신중에 가끔 와인을 마시거나, 임신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양가적인 감정을 품거나, 무통분만을 고려하거나,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거나, 육아로 지쳐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술집을 찾는다면 당신은 ‘나쁜 엄마’다. 이러한 문화 기준이 너무 확고하게 뿌리내린 터라 이런 기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때면 스스로 ‘나쁜 엄마’라 당당하게 칭하며 농담까지 한다. 우리는 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명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_16~17쪽
내 몸이 낯설어지는 경험
: 여성은 임신과정에서도 소외된다
수술실에 첨단 장비가 도입될 정도로 의학 기술이 발달했지만 임신과 출산 과정은 몇십 년 전과 크게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진행된다. 무통 주사를 맞아도 몇 시간씩 산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를 낳아도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태반을 내보내야 하고, 혹시 잔류 태반이 있다면 이를 긁어내야 하며 평생 치질이나 관절통, 요실금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렇듯 여성 건강에 대한 의학 연구는 갈 길이 멀지만 이에 할당된 기금이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며 대부분 남성인 의료진은 여성의 신체 변화보다는 신생아의 건강을 우선시하도록 훈련받아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이뤄짐에도 여성은 소외된다. 이에 저자는 임신 출산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학위를 가진 소수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전한다면, 여성이 변해가는 자기 몸을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정신적 고통을 덜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 정답은 없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줄여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는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모성 신화 대신 (낙태와 유산을 포함한) 임신, 출산, 육아 과정 속에서 고군분투중인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주목한다. 임신 출산 육아 과정에서 난생처음 겪는 일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모든 임신한 여성들의 선뜻 꺼내기 힘든 경험담을 나눈다. 책 속에 담긴 임신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성의 몸과 페미니즘’이라는 이슈의 중요한 키워드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온전한 역할에 대해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임상적으로 기분장애나 더 일반적으로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어도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 우리는 감정적으로나 호르몬적으로나 엉망진창이다. 이것이 산후에 이어지는 삶의 진실이다. 왜 이렇게 감정이 널을 뛰는지는 생물학적 근거로 분석할 수 있다손 쳐도 초보 엄마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도 받는다(어쨌거나 막 아기를 낳았으니까!). 우리는 남들에게 잘 버티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_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