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백 년의 연주여행
1912 아르투르 니키슈와 함께한 역사적인 북미 투어
2012 발레리 게르기예프, 콜린 데이비스 경, 하이팅크와 함께한 전 세계 투어
이 책은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이야기다. 솔로이스트들처럼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도 아니고, 그들을 이끄는 지휘자들처럼 추앙을 받지도 않는 사람들. 100명에 가까운 이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하나의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묵묵히 소임을 다한다.
특히 이 책은 오케스트라 연주자들 중에서도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야기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매년 런던에서 70회 이상 음악회를 열고, 비슷한 횟수로 외국 순회공연도 가질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세계 정상급 악단이다. 정상급 악단이라면 다 그렇지 않을까 싶겠지만 LSO는 예외적이다 싶을 정도로 벅찬 스케줄을 소화한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클래식 음악 수석 평론가로 활동한 톰 서비스는 자신의 저작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아트북스, 2013)에서 LSO의 혹독한 환경에 대해 다른 정상급 악단에 비해 급료는 훨씬 낮은 수준이지만 유럽 대륙의 연주자들보다 더 잦은 연습과 공연에 내몰린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일에 내몰리는 악단으로 외국 순회공연이 자국에서의 공연과 비슷하게 많다. 그러므로 LSO에서 일하는 연주자는 누구보다 오케스트라 순회공연에 대해 할 말이 많을 법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자 여행기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에서 일하는 사람은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도 길어 평생 동안 20년을 ‘출퇴근’에 쓸 정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 이 책은 그런 순회공연 중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오케스트라 음악가들 삶의 희로애락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한다. 2012년만 해도 LSO는 “런던에서 일본, 중국, 유럽의 곳곳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처음 방문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뉴욕으로도” 날아가 세계를 누비며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음악을 전달한다. LSO는 2006년 처음 한국을 찾은 이후 2012년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2013년에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와, 2014년에는 대니얼 하딩과 함께 한국에도 왔었다. 당시의 경험을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볼 수 있다. LSO 홈페이지에 연결된 블로그에 쓴 지은이의 글에서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2014년 대니얼 하딩과 함께한 서울 공연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한국 관객들이 “극히 경청했”으며 세 번이나 앙코르 곡을 연주하고 마지막 음이 끝났을 때 “한국이 마치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처럼 홀이 폭발했다”고 썼다.
또 이 책은 시간 여행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1904년 창단된 LSO는 1912년 역사적인 북미 대륙 순회공연을 떠난다. 영국 악단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당시 LSO는 ‘스타’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와 함께 뉴욕에서 시작해 중부 캔자스시티와 위치타까지 갔다가 캐나다의 세 개 도시를 돈 후 다시 보스턴과 뉴욕으로 마무리하는 3주간의 대장정을 펼쳤다. 실연이 아니면 음악을 듣기 힘들었던 시대에 미국에서 명망이 높았던 지휘자가 이끄는 ‘유럽 최고 악단’의 순회공연은 커다란 센세이션이었다. 이때의 이야기는 공식적인 몇몇 문서로서만 전해져왔지만, 당시 순회공연을 떠났던 팀파니 연주자 찰스 터너와 플루티스트 헨리 니스벳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생생한 이야기로 다시 살아났다. 이 책은 1912년의 북미 순회공연과 2012년 LSO의 세계 투어 이야기를 번갈아 배치해 100년 전과 오늘날 오케스트라 연주자 삶의 차이와 공통점을 비교해 읽는 재미를 전한다.
음악가의 삶을 다룬 책, 그것도 피아니스트가 아닌 오케스트라 음악가에 관한 책은 아주 드물다. 워낙 특이한 직업이라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흥미로운 면도 많다. 순회공연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만큼 각 나라 도시의 인상, 교통, 음식 이야기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음악가가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쓴 지휘자 이야기, 공연장 이야기도 흥미롭다. 리허설에 관한 대목도 제법 많아서 교향악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 1912년의 LSO와 2012년의 LSO, 그 차이와 공통점
1912년 북미 순회공연에서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의 지휘료는 하룻밤 1,000달러였다(그가 순회공연으로 받은 연주료 총액을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50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97명 오케스트라 단원의 하루 연주료와 같은 금액이었다. 또 이 순회공연의 미국 쪽 흥행사였던 하워드 퓨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었기에 미국에서 명망이 높았던 아르투르 니키슈를 불러오는 것이 투어 성공의 관건이라 생각해 그에게 먼저 접촉했고, 함께할 오케스트라로 LSO를 점찍은 것은 다름 아닌 니키슈 자신이었다. 흥행사로서는 니키슈가 고른 오케스트라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돈이나 스포트라이트가 지휘자에게 집중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반면 지휘자에 대한 열광의 정도는 100년 전이 훨씬 강도가 세었던 모양이다. 마치 요즘 보이밴드가 가는 곳마다 팬들이 몰려들 듯이 1912년 북미 대륙 순회공연 동안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를 쫓아다니는 여성 팬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니키슈에 대한 여성 팬들의 열광을 기사로 쓰기까지 했다.
100년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1912년에 LSO 단원들은 3월 29일 미국행 배에 올라 4월 6일 뉴욕항에 도착했다. 장장 열흘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런던에서 뉴욕까지 6시간 20분이면 그만이다. 물론 비자를 얻고 또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엄청 오래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1912년 여행 중의 단원들이 고향에서 첫 편지를 받은 것은 미국에 도착한 지 2주 만이었다고 한다. 2012년의 지은이는 컴퓨터를 열어 스카이프로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지만 집 떠나 여행 중인 것은 매한가지로, 다양한 방법으로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오늘날의 데이비스 씨 또한 외로움을 토로한다.
1912년에는 오케스트라에 여성이 딱 한 명 있었다. 하프 연주자인 미리엄 티모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뛰어난 여성 연주자들이 LSO 단원으로 있다.
이런 저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 있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장시간 여행, 비좁은 환경, 거의 살인적인 작업 시간”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좋은 음악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개개인이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도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연주자들의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 연주자의 눈으로 본 명지휘자들의 초상
<길 위의 오케스트라>가 주는 또 하나의 재미는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눈으로 바라본 명지휘자들의 모습이다. 100년 전의 아르투르 니키슈부터 오늘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물론 2013년 작고한 콜린 데이비스 경,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그리고 2014년 LSO를 이끌고 한국에 왔던 수석 객원 지휘자 대니얼 하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지휘봉 없이 손짓만으로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한 발레리 게르기예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발레기가 지휘봉을 들면 누구의 마음에 드는 연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냉랭하거나 밋밋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늘 눈빛으로 오케스트라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달한다. 관객들은 그의 부르르 떨리는 손짓에 주목하겠지만 오케스트라가 바라보는 것은 그의 눈빛이고 표정이라고. 예를 들어 게르기예프가 오케스트라를 보며 웃으면 그건 “속도를 빠르게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경제적인 제스처’를 쓰고 ‘말 없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지휘자다. 하지만 지은이는 하이팅크가 짧게 말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임팩트가 강하다고 전한다. 적은 말과 작은 동작으로도 3분 만에 LSO 전체의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지휘자라는 것이다.
1959년부터 LSO를 지휘해온 콜린 데이비스 경은 “자신이 무대를 확실히 책임지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다룬 2012년 이 노장 지휘자에 대한 지은이의 애정이 책의 곳곳에서 묻어나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연주회 중에 지휘자가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증언하는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LSO가 연주하는 말러의 9번을 하루는 그[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지휘로, 하루는 발레리의 지휘로 들어보면 지휘자가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 쑥 들어갈 것이다. 저마다 선호하는 연주야 있겠지만, 우리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는 청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콜린이나 베르나르트와 베토벤을 연주하다가 존 엘리엇이 지휘봉을 들면 스위치가 찰칵 켜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 타이타닉호를 탈 뻔했던 LSO―연주여행 중의 에피소드들
순회공연을 위해 여행하는 오케스트라에는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1912년 역사적인 북미 순회공연을 위해 LSO가 처음 고려했던 배는 처녀항해를 앞두고 건조 중에 있던 타이타닉호였다. 날짜도 순회공연 일정에 딱 맞았고 워낙 화제가 되었던 배였기에 순회공연의 홍보에도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LSO 단원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타이타닉호의 건조가 늦어지면서 그들은 무사히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오케스트라도 사건사고를 피할 수는 없다.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폭발해 전 유럽 공항이 폐쇄되면서 예정된 연주회 일정 때문에 동분서주하기도 하고, 점심으로 먹은 홍합찜이 잘못되어 연주회 도중 뛰쳐나오기도 한다. 야외 연주회에서는 새 떼가 울어대서 음악소리를 잡아먹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폭우에 연주가 중단되기도 한다.
1912년 북미 순회 연주여행 중 LSO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도 했다. 연주가 없는 날에도 하루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하고 기차 식당 칸과 호텔 레스토랑에서 서둘러 식사를 하고 좁은 침대에서 눈을 붙이는 열악한 상황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이 침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그럼에도 스케줄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케스트라는 예정된 연주를 해야 했다.
이처럼 이 책은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삶을 때로는 재치 있게, 때로는 감동적이게, 또 무엇보다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아가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에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이 이해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한다. 한 세기의 간격을 두고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전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이야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