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언제 와?”
“엄마, 아빠는 왜 노는 날엔 잠만 자?”
아이의 눈에 아빠는 하숙생 같다. 회사의 과중한 업무와 퇴근 후의 술자리에 푹 절은 몸을 달래느라, 조금씩 벌어지는 아이와의 거리를 실감하지 못하고 특별한 추억도 만들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손에 리모컨을 쥐고 주말을 보낸다. 이것이 우리 시대 아빠들의 안타까운 초상이다. 결국, 서로 무관심해지는 가운데 부모 자식 간의 끈끈한 정도 희미해지고 무미건조한 일상만 계속된다. 어떻게 하면 아빠는 아이와 멀어진 거리를 좁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왕성하고, 아빠의 따뜻한 애정도 필요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을까?
여기, 이런 고민 끝에 아들을 데리고 40일 동안 유럽을 달린 아빠가 있다. CF 프로듀서 및 광고 촬영 감독으로 활동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광고쟁이’ 아빠는 과도한 경쟁에 아이를 떠미는 것보다 ‘창의력’과 직결되는 감성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애착이 생기는 예술작품의 이야기가 바로 자라나는 아이들의 창의력과 감성을 키워주는 훌륭한 자산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예술 담당 기자 조너선 존스가 자신의 블로그에 발표한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걸작 20」을 접하고, 미술작품은 직접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그의 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떠올리며, 아들의 창의력과 감성 발달을 위해 ‘진짜 명화’를 보여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렇게 해서 조너선 존스의 명작 리스트를 지도 삼아 떠나는 유럽 미술 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명작 리스트를 꿈꾸다
2006년,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네티즌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작 50점을 선정했다. 그에 앞서 조너선 존스는 그동안 자신이 섭렵한 명화를 떠올리며 블로그에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걸작 20」이라는 자신만의 명작 리스트를 올렸다. 그리고 덧붙여서 “우리가 책을 비롯해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한 명화는 명화를 직접 보는 것과 아주 미세한 것에서부터 큰 부분까지 다르다”며, “만약 여러분이 예술작품을 알고자 한다면 대체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존스의 기사에 깊이 공감한 지은이는 예술작품이 가장 많이 모인 곳 중 하나이자, 화가들이 사랑한 나라 프랑스에서 7년이나 유학 생활을 했음에도 자신만의 명작 리스트를 뚜렷하게 떠올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두 가지 생각을 한다. 하나는 존스가 엄선한 명작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여행을 통해 아들이 자신만의 명작 리스트를 만들어보게 하는 것이었다.
눈과 귀가 즐거운 유럽의 미술관 22곳을 함께 달리는 동안 아빠와 아들은 같은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쌓였던 서먹함을 허물고 마음으로부터 서로를 꼭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함을 나눈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즐기는 그림 이야기
이 책의 기본이 되는 것은 그림에 얽힌 신화, 역사, 상징 그리고 화가의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딱딱한 교실 밖을 벗어난 아이와 아빠가 그림을 지도 삼아 자유롭게 유럽 미술을 탐험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낸다.
보티첼리를 바꾼 그림 「비너스와 마르스」, 마네의 마지막 걸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비밀의 주문 콘트라포스토가 있는 「밀로의 비너스」, 왕실 가족의 초상화에 자화상을 그려 넣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1년에 두 번만 열리는 비밀스러운 퍼즐 「이젠하임 제단화」, 여행의 시작이 된 그림 「성녀 루치아의 매장」…….
미술은 시대에 관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보고이자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고, 이 이야기는 그림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는 아들에게 그림을 느끼는 것은 교과서를 외우듯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의 요소를 관찰하고 상상하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책에는 때로는 엉뚱하게, 때로는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는 아이의 질문과 그에 답하는 아빠의 대답이 살갑게 펼쳐진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그림과 그림을 낯설어하는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림에 어떤 신화와 역사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 그림이 예술가와 사회에게 어떤 존재인지, 예술이 왜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지 등을 아빠와 아들의 톡톡 튀는 대화로 들려준다.
길을 잃고, 소매치기를 당하고, 광장을 가득 채운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낯선 땅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에피소드는 독자가 실제로 유럽을 여행하는 듯한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빠와 함께 활짝 연, 거장들의 예술 창고
온 세계에서 가져온 유물로 가득 찬 영국박물관, 명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내셔널갤러리, 작지만 알찬 코톨드갤러리, 파리 미술 여행의 백미 루브르, 인상주의 미술의 보물섬 오르세 미술관, 고흐의 10년을 그대로 담아낸 반 고흐 미술관, 콜마르의 자부심 운터린덴 박물관, 동화 같은 탱글리 미술관, 고흐의 마지막 장소 오베르쉬르우아즈…….
아빠와 아이가 손을 잡고 활짝 연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은 세계의 거장들이 모인 자리이자, 사람과 예술이 함께 호흡하는 예술 창고다. 그래서 아이는 어느새 예술작품과 가까워져 재미를 느끼게 되고, 여행 후반부에는 그동안 신체의 일부처럼 가지고 다니던 PMP와 에스보드보다 예술작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이와 그림의 눈높이를 맞추어서 생생하게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고 예술과 친해질 수 있도록 이끈 미술 여행의 결실이다.
김호선, 임권택 감독의 극영화 조감독을 거쳐 CF 프로듀서 및 감독으로 일한 지은이의 경험과 지식을 살려 광고 속에 예술작품이 활용된 예를 소개하는 작은 이야기 코너 ‘art in ads’는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지은이는 아이와 함께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를 거쳐 벨기에와 스위스를 지나 이탈리아에 있는 미술관을 여행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맞추지 못해 감상하지 못했던 그림을 보러 마드리드, 헤이그, 파리를 달린다. 각각의 장은 도시 혹은 나라로 나뉘어 있어서 한 도시에 어떤 미술관과 예술작품이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부록으로 실은 ‘TIP, 알고 가세요!’라는 페이지에는 아빠와 아들이 여행하는 동안 찾아갔던 미술관의 개관 시간, 휴관일, 입장료 등의 정보를 모두 담아 미술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책 속으로
우연히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카라바조의「성녀 루치아의 죽음」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명작은 실제로 그 앞에 서 봐야 그 가치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실물을 보아야만하는 명작 20점의 목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다음은 존스의 기사 내용의 일부이다.
그런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들의 특성을 감상하려면, 직접 가 봐야 한다. 예술작품은 사람과 비슷해서, 단순한 특징뿐 아니라 좀 더 신비로운 수준까지 모두가 다 다르다. 예술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은 없다. 오로지 예술작품만이 있을 뿐이고, 그 각각을 직접 대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수년 동안 책에 있는 이미지를 통해 예술작품을 접했는데, 그로 인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실물을 보면 기본적인 물리적 특징에서부터 그 모든 것이 내가 기대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조잡한 수준에서 더 크거나 더 작았다. 게다가 복제된 이미지의 색상은 진짜와는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 예술작품을 알고자 한다면 대체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프롤로그, 「아빠와 민석, 여행을 시작하다」에서
“어때? 내셔널갤러리의「암굴의 성모」와 다른 점을 찾았니?”
“네. 영국의 내셔널갤러리의 암굴의 성모에서는 천사 우리엘이 그냥 요한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루브르의 그림에는 요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어요. 내셔널갤러리에서는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한의 머리 위에 천사 표시도 있었고요.”
“천사 표시? 아, 그건 후광이라고 하는 거야. 후광이 생겨서 세 사람이 더 눈에 띄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효과뿐 아니라,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도 있단다.”
“아빠,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갖고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오,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셔널갤러리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었던 사람은 요한이란다.”
“왜 요한이 십자가를 가지고 있어요? 십자가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지고 있을 땐 보통 고통의 의미로서 쓰인 거야. 그런데 그림에서 가느다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백발백중 요한이야. 요한은 그리스도가 임하실 것을 전하는 역할을 하거든. 그 역할의 상징으로 이렇게 이 지팡이 같은 십자가 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오호, 그렇구나!”
- ‘민석, 숙제를 마치다’, 2장「그림 읽는 재미를 열어준 파리」에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덟 살 때 카메라를 선물 받고, 어려서부터 그것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고 한다. 그 경험이 그를 오늘날 전 세계 영화의 제왕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민석이 스필버그처럼 될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상상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면, 원하는 것을 더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 유년 시절부터 접한 다양한 예술의 감동과 충격이 결국 모두를 레오나르도 다빈치 형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가능성과 흥미도 절대 흘려버리지 말자.
- 에필로그「예술이 아이들의 재산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