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시학의 단편들』이 출간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딸이자 이 책(프랑스어본)의 편집자인 수잔 바슐라르가 책머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우선 바슐라르는 불에 관한 두 저서(『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존재의 양극에서 체험되는 상반된 불의 이미지, 즉 아니마의 불과 아니무스의 불을 고찰하고자 했다. 제1부에서는 아니무스의 불을, 제2부에서는 아니마의 불을 연구하려는 것이 최초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집필하는 중에 또다른 아이디어들이 생각났고 그때마다 그것을 집필 계획에 포함시켰다. 바슐라르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끝없는 몽상 덕분에 책은 점점 방대해져갔다. 수잔 바슐라르는 이런 아버지를 "영원한 학생"에 비유했다.
영원한 학생이었던 아버지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유년 시절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유년 시절을 그리워했다는 표시도, 순진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능력, 즉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경탄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배우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잔 바슐라르, 「책머리에」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진 바슐라르는 결국 제2부를 포기하고 제1부를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피닉스에 관한 ´피닉스의 시학´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불의 시학´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제쳐두고, ´피닉스의 시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슐라르는 이 책 역시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딸 수잔 바슐라르가 애초에 구상한 ´불의 시학´ 서론과 ´피닉스의 시학´ 서론 그리고 ´불의 시학´ 제1부에 해당하는 원고를 분류·정리·편집하여 바슐라르 사후 26년이 지난 1988년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피닉스의 시학´ 원고는 서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분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어 아쉽지만,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의 테마에 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을 품은 신화적 존재들의 시적 이미지론
이 책은 서론과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슐라르는 고대 전설과 신화 속 존재들이 가진 불의 이미지에 대한 몽상에서 출발, 상승의 의지를 가진 인간존재의 정신현상을 탐구한다.
피닉스…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서 시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피닉스에 관한 장. 바슐라르는 유년 시절 어느 햇빛 찬란한 여름날 강가에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불새, 피닉스를 보았다. 불을 최초로 체험한 이 순간, 그는 세계관이 뒤흔들렸다고 고백한다. 이 장은 특히 피닉스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우주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피닉스)는 유일하다. 그는 독특하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마술적 순간들의 스승이며,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통합이다. 그는 자신의 장작더미가 불타오르는 최후의 순간에 최고의 영광에 도달한다."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주시하는 장. 바슐라르는 불의 유용성을 넘어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초인간성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 승화를 보여준다. "시적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들은 항상 인간의 본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정신적 행위를 가리킨다. 정신현상의 미학, 다시 말해 정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정신적 행위가 프로메테우스의 기호 아래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에트나 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명상. 그의 죽음은 단순히 철학사의 잡보기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삶과 죽음을 숙고하고 불을 꿈꾸는 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하는 의지의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에 관한 장.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이러한 결정의 순간들은 시간의 시학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 존재를 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긴장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불의 솟구침을 포착하고 불에 참여하면서 존재 자체가 불처럼 용솟음친다고 이야기한다. 바슐라르는 불의 역동성과 끝없이 상승하려는 존재의 의지를 동일하게 이해하고, 발레리, 엘리엇, 횔덜린, 니체 등 시인들의 저작들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고찰한다. 바로 여기서 몽상과 상상력이 응축된 절정의 언어미학이 탄생했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비록 완성되지 못한 저작이나, 바슐라르가 구축하고자 한 언어미학을 음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철학자-시인의 몽상으로 탄생한 새로운 언어와 행복하게 조우하고 높이를 향해 치닫는 몽상에 빠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 독창적인 사고와 개성적인 문체, 새로운 철학적 화법을 제시한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 1884년 샹파뉴 지방의 작은 마을 바르 쉬르 오브에서 태어나 중학교 교사, 우체국 직원 등으로 일했고, 마흔 무렵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7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디종 대학을 거쳐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51년과 1959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61년에는 국가문학대상을 받았다. 특히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학적 사유와 직관적이고 시적인 사유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인식론과 과학이론, 예술이론과 시인의 창조행위 등의 문제에 천착했다. 저서로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공간의 시학』 『촛불의 미학』 등이 있다.
옮긴이 안보옥
가톨릭대(옛 성심여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고, 「장 지오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공간」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4년 3월 20일 발행 *ISBN 89-8281-800-6 03860 *사륙판 양장/256쪽/값 12,000원 *담당편집: 황문정(031-955-8863)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에 관한 연구서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