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전설의 묘미
어릴 적 침대맡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흥미로운 이야기나 즐겨 보던 동화책과 그림책에 자주 묘사된 이야기의 기원은 대부분 구비전설이다. 구비전설의 생명력은 재미에 있다. 책을 읽다보면 구연자가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이야기를 재미나게 전한 당시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실감난다. 지역 방언과 입말이 살아 있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다.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어 기억에 의존해 오랜 세월 전달된 짤막한 이야기는 문자로 기록된 이야기보다 강렬한 인상을 준다. 구비전설은 믿기 힘든 기이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양 그럴듯하게 전해진데다가 이야기 말미에 관련 증거물이 존재한다고 언급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대한민국 대표 전설
전국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우리나라 주요 전설들이 있다. 특이한 이름을 지닌 지형지물은 대개 전설이 얽혀 있으며, 그 자체가 증거물이 되어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대표적으로 장자못 전설, 아기장수 전설, 달래고개 전설이 있다.
장자못 전설은 스님을 박대한 부자의 집터가 함몰돼 연못이 된 이야기로, 스님에게 따로 시주한 며느리만이 살길을 알게 되지만 금기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며느리는 바위로 변해버렸다. 며느리는 혼자 나아가야 할 때 뒤를 돌아보아 돌이 돼버려 과거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기장수 전설에서 아기장수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채 태어나 인류를 구원하러 왔지만, 부모는 비범한 아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살해하고 만다. 또다른 전설에서 아기장수는 사람들을 도와줘도 외면받기만 하여 바위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그러한 형상의 바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듯 아기장수 전설은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음을 던진다.
달래고개 전설은 남매가 함께 고개를 넘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오라비가 비에 옷이 젖은 누이를 보고 성욕을 느껴 자신의 성기를 바위에 짓찧자 누이가 “달래나 보지”라고 울부짖었고 그뒤로 그 고개 이름은 달래내고개가 됐다 한다. 이 설화는 ‘남녀’라는 자연적 본능과 ‘형제’라는 문명적 윤리 양쪽에 걸친 인간성을 보여준다.
자연은 인간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산과 바다, 강과 들에 대한 전설부터 바위나 굴, 꽃과 나무, 각종 동물에 대한 전설까지 자연 전설에는 민중의 애환이 자연 곳곳에 스며 있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생명력을 품은 채 인간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유명한 꽃 전설인 「백일홍 유래」에서는 총각이 용의 제물로 바친 처녀를 구하고 구십 일이 지나서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구십 일이 지나도 총각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구십구 일 만에 애간장이 타서 죽었다. 총각을 백 일째에 돌아왔고, 처녀가 묻힌 곳에는 백일홍이 피어나 그 꽃을 아무리 꺾어도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새, 호랑이, 뱀과 용, 백여우와 구미호 등 동물에 얽힌 전설도 있다. 「삼봉산 절터골 호랑이 전설」은 야생 호랑이가 인간과 공존하며 그를 지켜주다가 피 냄새를 맡자 숨겨진 폭력성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다. 「새엄마로 들어온 아차산 백여우」는 산속 여우가 예쁘고 인자한 엄마로 둔갑해 어린아이의 간을 빼 먹으려 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신이하고 흥미로운 문화사
마을과 도시가 생겨난 유래와 절과 암자, 신당, 불탑 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각종 풍속에 얽힌 유래에는 신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절은 외딴 산속에 있고 다양한 사람이 방문하는 열린 장소여서 이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 생겨났다. 「부안 내소사 창건에 얽힌 전설」은 크고 화려한 절을 짓는 과정에서 여러 건축 기술자가 기예를 다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소사를 지을 때 목수는 먹줄을 당겨 자귀로 나무를 깎고, 왕토쟁이는 검은 옷을 입고 까만 신을 신은 채 천장에 백회를 발라 실력을 겨루었다. 이때 왕토쟁이 코끝에 백회가 떨어져 목수가 코끝을 자귀로 찍자 백회가 똑 떨어졌다고 한다. 또 목수가 깎은 목침을 공양주가 감추자 목수가 홧김에 목침 하나를 빼버렸다는 내용은 실제로 내소사 대웅전에 목침 하나가 빠져 있는 형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 도읍에 관한 여러 일화를 자연스럽게 엮어 구연한 「서울의 유래」와 옛날 인천에 있었던 독특한 이름의 오달기라는 주막거리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조금 덜어 던지는 고수레 풍속, 전통 혼례식에서 기러기를 놓는 이유, 동짓날 팥죽을 끓이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대중의 시각에서 재탄생한 인물
인물 전설은 실제 인물의 행적을 소재로 하는데, 인물이 세운 혁혁한 공을 이야기하기보다 통념에서 벗어난 인물의 삶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좌절한 인물의 모습을 주로 그린다. 「해골 물에 도를 깨우친 원효대사」에서는 원효가 당나라로 불경 공부를 하러 떠나려다가 다시 돌아와 일상에서도 충분히 구체적인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드러낸다. 「이성계가 성공한 내력」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맥락을 야사(野史) 형태로 전한다. 한 사람이 이성계에게 두란이라는 자를 만나고 사람을 백 명 죽여야 성공을 한다고 알려줬는데, 이성계는 소문이 날까봐 그 사람을 죽였다. 삼 년이 지나 이성계는 우연히 두란을 찾아 함께 길을 떠난다. 여름에 잘 씻지 못해 이가 득실거리자 이성계는 이를 아흔아홉 마리 잡아죽이고서 거지 한 명을 무자비하게 때려죽였다. 그리고 두란과 함께 적군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이성계는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이성계가 천운을 얻은 존재이자 비상한 능력자라는 인식과 자기 성공을 위해 사람을 함부로 죽인 냉혹한 사람이었다는 인식이 엇갈려 나타난다. 「황희 정승과 농부」는 조선 초기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정승에 대한 유명한 일화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재상보다 더 생각이 깊은 하층민의 지혜를 부각한다. 이러한 전설들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대중의 비판적·반성적 인식이 반영되어 문헌 기록에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다.
“아차! 어제 저녁에는, 그 자정에는 참 그렇게 맛있고 내 갈증도 해갈시켜주고 좋았는데 나중에 와보니까 도저히 먹을 수가 없구나. 이것은 그릇의 탓이냐, 물의 탓이냐? 내 마음의 탓이다!” (「해골 물에 도를 깨우친 원효대사」 255쪽)
“진짜 참말씀을 드리는 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같이 놓고 봤을 때 내가 어느 소가 참 잘한다, 힘이 세다 못하다 하면은 그 소들이야말로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황희 정승과 농부」 302쪽)
전설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이야기들이 잊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구술되고 있음은 그 징표가 된다. 이들이 시대를 관통해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은 그럴 만한 힘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고전 가운데 전설만큼 자생적 생명력을 발휘하는 양식은 보기 어렵다.
전설은 통념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함으로써 상투화된 일상을 성찰하고 그 틀을 깨게 한다. 우리의 삶과 의식을 팽팽하게 살아 있도록 하는 정신적 역동은 문학의 본질적 존재 이유다. 인류가 존재하고 언어 행위가 계속되는 한 전설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전설들로부터 앞으로도 길이 이어질 특별한 이야기의 원형과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이야기들이 책 안에 갇히지 않고 또다른 언어로 살아나 세상을 힘차게 누빌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