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아무도 그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_「열매를 꿈꾸며」 부분
그리운 사람들을 너무 오랫동안 문밖에 세워둔 것은 아닐까. 문 열어두면 문 밖엔 아무도 없고 골판지 같은 나무들이 서로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_「꽃 없는 나무, 제주(濟州)」 부분
희망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내가 울다. 덕소로 가서 한 번 돈 내고 영화 두 편 보다. (…) 꿈꾸는 나무들은 꿈 밖 어느 가지도 흔들지 않다. 생선의 언 주둥이가 영 다물어지지 않던, 뿌리가 더이상 땅 위를 묶지 않던, 차가움이 한꺼번에 살얼음으로 번져가던, 겨울과 봄의 접경. _「희망」 부분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연호 시인의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을 문학동네포에지 16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2004년 8월 천년의시작에서 선을 보인 뒤 17년 만이다. “환상과 언어를 긴밀히 엮어냄으로써, 환상에 삶으로서의 깊이와 무게를 얹어주고 있다”(신경림, 김광규, 김훈)는 평과 함께 등단한 조연호. 시인이 이룩해낸 새로움이 더욱 새롭고 깊어지기 바란다던 1994년에서 그는 얼마나 멀리, 혼자 걸어온 것일까. “함께 출발했던 동시대의 누구와도 다르게, 그저 언어의 성채를 쌓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온 조연호. 그의 “신과 자연 그리고 세계를 배반한 바벨탑의 언어”(김정현)가 겨누고 있는 심연으로 인도하는 출발점이 바로 이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이다. “구토, 현기증, 불투명한 시선으로 포착한 사물 등이 가득한” 문제적인 51편의 시. “내면에 가득찬 실존적 갈망을 매혹적인 시적 풍경으로 바꾸는 연금술”은 “세계와 현실을 일그러뜨”린다(김춘식).
엄마, 사생대회 가야 하는데 물감이 말라서 안 나와, 알록달록 물감 덩이를 물에 풀면 알약의 캡슐처럼 느리게 녹아내리던 엄마의 상처(「만화가 소년」). 달그락거리는 배고픔들이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꿈 앞을 서성대고(「얼음불꽃」) 찌처럼 조용히 그늘 위로 머리만 내민 봄볕은 자기를 물고 어둠 밑으로 순식간에 내려갈 바람의 입질을 기다린다(「입춘 부근」). 따뜻한 얼굴과 아름다운 노래를 아무데서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아이들은 개들과 함께 동네 쓰레기통을 들쑤시고 다니고(「모래내」) 멀리 공장 굴뚝에까지 가닿는 좋은 부력의 종이비행기를 접고 싶었지만 날려보낸 것들은 멀어지지 않았다(「유원지 필담」). 처음엔 얇은 비닐 막 같았고, 김 휘휘 도는 찌개 그릇 같았다가 자기 입에 못 담을 험담들이 되어가는 생(生)(「모래의 시작」). 문득 길을 돌아보면 아카시아 잎사귀는 정말로 마지막이란 말을 담으며 그리움을 눈부셔하고 있었다(「몇 개의 길」).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을 던진다. 항상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가는 그 돌을(「불을 꿈꾸며」).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 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등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_「오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