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다.”
이야기로 구원받고 이야기로 구원하는 사람
작가 한승원의 순간과 영원을 담은 한 권의 우주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한 한승원.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현 동리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통해 한국문학에 족적을 남기는 것은 물론, 살아 있는 한국문학사 자체에 이른 대작가 한승원. 그런 그가 인생에서 단 한 번이자, 단 한 권일 자서전 『산돌 키우기』를 문학동네에서 펴낸다. 올해로 등단 55주년, 반세기가 넘도록 소설을 써온 작가이자, 어느덧 망구(望九)의 나이도 지나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낸 한 인간의 촘촘한 발자취가 이 한 권에 옹골차게 들어차 있다. 간단없는 왕성한 필력으로 시, 소설, 동화, 인문서, 에세이를 망라하는 수십 종의 책을 써낸 전방위적 작가의 시작과 끝을 독자는 아쉬움 없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산돌 키우기』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승원의 일생을 총망라한 자서전인 동시에, 한승원이라는 예외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에 다름 아니리라.
“아버지는 다시 태어났고 자랐고 살았던 것이다, 이 페이지들 사이에서.”
_한강(소설가)
남은 생을 오롯이 문학에 헌신하기 위해, 그는 고향인 장흥으로 되돌아가 ‘해산토굴’에 자신을 가두어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쓴다. 시시포스와도 같은 구도자적 삶을 살며, 작가는 이번 책을 (고려장 전설 속) “아들의 등에 업혀 가는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고 귀가할 아들이 길을 잃을까봐 돌아갈 길 굽이굽이에 솔잎을 따서 뿌리듯 이 글을 쓴다”(「서문」)라고 밝힌다. 한국문학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하는 한승원은 실제로 두 작가(한강, 한규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후세이자 후배에게 남기는 이 글은 감히 ‘인류의 유산’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이채롭고, 새롭고, 깊은 통찰력이 스며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인물이 굴곡진 역사 속에서 야만에서 문명으로 옮겨가는 눈부신 순간이, 한 인간이 태어나고 떠나고 다시금 태어난 자리로 되돌아가는 경이로운 순환의 궤적이, 한 작가가 문학청년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대가로 발돋움하는 갈피갈피가 『산돌 키우기』 속에 반짝이는 빛을 숨긴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강의 시원(始元)에 도착한 듯, 노거수(老巨樹)로 빼곡한 숲의 초입에 당도한 듯, 석영 동굴의 입구와 마주한 듯한 마음으로 천천히 페이지를 들추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자서전 『산돌 키우기』는 한승원 작가의 태몽으로 시작한다. “하늘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유자를 주워 치마폭에”(「태몽」) 담는 어머니의 꿈. 어머니는 그에게 여느 유자보다 크고 탐스러웠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해주고, 작가는 이를 여느 사람과는 다른 특출한 삶을 살게 될 것이란 예언처럼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묻어나는 곰살궂은 태몽을 작가는 허투루 흘려듣지 않고, 그것을 마치 신탁이자 의지로 삼아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절을 유년기로 보낸 그는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삶의 긴박감, 생과 사의 무자비함, 폭력과 야만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해방이 되고도 한반도의 남쪽 끝까지, 아이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침투한 이념의 대립을 몸소 겪어내며 시대의 아픔을 몸과 종이에 새긴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새 없는 팍팍한 시절에도 그를 견디게 하고, 위로하고, 멀게는 ‘작가 한승원’으로 키워내는 할아버지가 존재한다. 작가는 “할아버지는 내 속에 하늘을 심어주려 했다” (「하늘」)는 말로 그에 대한 회상을 시작한다. ‘땅’을 떠오르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버지와 대비되는 ‘하늘’의 할아버지. 작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이야기꾼이자 글(천자문)을 알려주는 할아버지와의 운명적인 일화를 통해 평생에 걸쳐 자신을 지배하고 또 구제하는 이야기의 힘을 다시금 복기한다. 할아버지로부터 건네 들은 지혜와 통찰이 담긴 옛날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여우 이야기 들을 작가의 입을 통해 지금의 우리가 건네받는 체험은 ‘유산’이라는 말을 절감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었다. 가족으로서 내가 함께 겪었거나 지켜보았거나 알고 있는 일들은 아버지라는 한 사람이 팔십여 년 동안 살았던 삶의 일부이자 단면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매 순간 느꼈다. 한 길 사람의 속은 얼마나 깊고 아득한 것인지를. _한강(소설가), 발문 「반짝이는 유리 기둥 사이에서」에서
역사를 살아낸 모두가 소설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고 또 그 길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장남(작가의 형)만을 위하며 집안에 정주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그에게 거역과 자유를 꿈꾸게 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시련이었으며, 작가에게 유독 극진한 애정을 표현한 어머니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이를 널리 타인에게도 실천하게 하는 구도자적 인물의 표상이었다. 이후 그는 문예반에 가입하여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로만 길든 세계를 벗어나 한국 현대문학으로, 세계문학으로 성큼 도약한다. 감수성과 경험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던 예외적인 내력, 자신의 눈에 담긴 풍경을 언어로 표출하고자 했던 시심, 자신을 구원했던 이야기의 힘을 타인과 나누고자 했던 마음은 이윽고 그에게 문학이라는 병으로 발현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삭발로 의지를 표현하며, 결국에는 설득하여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장차 시인 소설가가 되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세상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소”
역사의 폭력은 그에게 상흔을 남기지만 ‘대의’ 역시 남기고, 마지못해 임했던 농사일과 밤배질의 나날은 시의 풍경을 별자리처럼 그의 가슴에 남긴다. 자신을 두렵게 만들고 고통을 주었던 인간군상은 모두 핍진한 캐릭터로 남아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호재(好材)가 된다.
그러나 교직을 부업으로 삼으며 신인 작가로 살던 시절, 작가에게 또 한번의 변곡점이 될 시련이 찾아온다. 갓난아이를 여의는 일(이를 훗날 한승원은 단편 「가을 찬바람」으로, 한강 작가는 『흰』으로 써낸다)을 겪은 뒤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것. 그는 두번째 삭발을 감행하며 참회와 회심의 시간을 가지고, 이후 상경해 전업작가로 살며 주옥같은 명작들을 쏟아낸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통과하며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한층 치열해진다. 『불의 딸』『아제아제 바라아제』 『동학제』 『원효』 『추사』 『다산』을 써내며 소설가로 승승장구하고, 시집 『열애일기』『달 긷는 집』『꽃에 씌어 산다』를 펴내며 명실상부 시인-소설가로 자리매김한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신만이 완성된 존재이다. 노예인 나는 그 완성을 위해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처럼, 바위를 굴리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쓰고, 다시 고쳐쓴다. 그것이 허공중에 발자국을 남기려는 무당새의 몸부림인지도 모르지만. _440쪽, 「도깨비와 춤을」에서
끊임없이 영향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배움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 시대-이곳의 시시포스 한승원. 운명에 맞서되 운명에 몸을 맡기는 유연함을 통해 그는 무엇보다 쓰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는 “산조(散調)는 자유로운 가락이고, 산인(散人)은 자유자재한 사람이고, 산문(散文)은 시(詩)처럼 운율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글이므로, 시에 비하여 산문은 말이 푸져야 하지만, 헤프지 않아야 하고, 철저하게 말 아끼기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원효의 문장」)라고 말한다. 이는 작가 한승원의 산문정신과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열쇠이자 인생관으로도 읽힌다. 그는 산인으로, 시인으로 살며 다름 아닌 ‘쓰기’로 증명하고, “이념이나 정의를 위해 글을 쓰지 말고 진리를 위해”(「길 굽이굽이에 솔잎을 뿌려놓는다」) 쓰는 작가가 되기를 오늘도 희망한다.
『산돌 키우기』를 읽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자서전이자 또하나의 ‘소설’이며, 때로는 가장 인간적인 ‘신화’로 읽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인간 한승원의 발자취를 오롯하게 따라 걷는 일이자 작가 한승원의 ‘창작 노트’, 작품의 ‘후기’, 창작의 비밀을 누설하는 ‘비서’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한승원’이라는 석 자 이름의, 몇 줄의 문장으로 마름질된 이력의, 몇십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못한 세부가 『산돌 키우기』에 있다. 그렇게 살아내며 쓰고, 쓰면서 살아낸 흔적이 장흥 바닷가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생명력으로, 파도가 닿은 해변 모래알의 반짝임으로 담겼다. 이제, 먼 우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작가는 도리어 우리를 먼 우주로 데려다놓는다. 비로소-이렇게, 우리는 『한승원』이라는 한 권의 책을, 한 권의 우주를 만난다.
■ 추천의 말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가족사의 세부는 이 책에 담겨 있지 않다. 대신 아버지 자신의 삶이 여기 있다. 그가 직접 추려내고 힘을 다해 윤을 낸 유리 기둥들이 있다. 오직 글쓰기라는 외통수의 열의-해법-구원으로 삶의 모든 순간들이 수렴되었던 한 생애가 있다.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을 삶 앞에 두지 않겠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반짝이는 석영 같은 이 페이지들 사이를 서성이고 미끄러지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척박한 흙을 밀고 그가 기어이 꽃피었는지. 그걸 가능하게 한 글쓰기가 그의 종교였음을. 그토록 작고 부드러운 이해의 순간이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_한강(소설가)
■ 작가의 말
오래전, 영산강을 탐사하려고, 전라남도 일대의 25,000분의 1 지도 조각들을 넓은 거실 바닥에 늘어놓고 붙이니 그 강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해졌다. 나목이 된 노거수(老巨樹)를, 목포에서 담양 쪽으로 가로눕혀놓은 듯싶은 영산강을 일 년여에 걸쳐, 담양 북편의 시원에서부터 목포 앞바다까지 흘러가면서, 강의 잔가지들에 주렁주렁 열린 신화, 전설, 정치, 경제, 문화의 풍경들을 읽어냈듯이, 나는 나의 강을 그렇게 탐사하기로 했다.
‘나’라는 생명체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어떤 호혜를 입으며 성장하고, 언제 무슨 상처를 입었으며, 그것은 어떤 흉터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로, 무슨 색깔, 어떤 무늬와 결과 옹이들이 생성되고, 그것들이 내 성정과 사상과 삶의 역정을 어떻게 굴절시켜왔고 지금 어떤 자세로, 외계로의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진술하기로 한다.
아마도 나의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르는 이 책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저술자가 그랬듯) 내가 이야기를 통해 삶의 빛을 얻고, 순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왔음을 증명해주는 것일 터이다.
2021년 매화 향기 속에서
해산토굴 노인 한승원
■ 책 속에서
불교 『원각경』에 “달을 보라면 달을 볼 것이지 왜 손가락을 보느냐”라는 말이 있다. 모든 시나 소설(이야기)이 ‘손가락질’을 하는 짓이라면 속에 들어 있는 주제는 ‘달’이다. Paradox는 ‘para(벗어나다, 초월하다, 뛰어넘다)+doxa(말)’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딸이 오래전에 가르쳐주었다. _51쪽, 「이야기의 힘」에서
“눈이 작은 그 여자”라고 쓰면 설명이므로 독자는 그 애매함으로 인해 절망한다. “단춧구멍처럼 눈이 작은”이라고 비유를 통해 말해야 단춧구멍의 모양새를 통해 절망에서 벗어난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푸른 산”이라 쓰면 절망한다. “쪽물을 들여놓은 듯싶은 하늘” “청남색 잉크를 가득 채워놓은 듯한 바다” “진한 쑥물을 뒤집어쓴 듯한 산”이라 해야 절망에서 벗어난다. _299쪽, 「표현 혹은 형상화」에서
공작새 수컷은 세상을 향해, 꼬리와 날개를 부챗살처럼 펴서 무지개 색깔의 홀로그램 문양을 과시할 때 항문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채플린의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_439쪽, 「도깨비와 춤을」에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닷가 산책을 하거나 서재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써도 풀리지 않았다. 외풍이 심한 방에서, 찬바람을 막아주는 두꺼운 겉옷과 내의를 벗고 얇은 홑옷만 걸치고 있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춥고 허전했다. 나는 잊으려고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늘 그랬듯 나를 구제하는 것은 나의 글쓰기였다. _443쪽, 「곱게 화장한 99세 어머니의 얼굴」에서
우리의 눈이 별빛을 만든다. 나는 건강할 때면 보이지 않던 것이 앓을 때면 보인다. 슬픈 눈으로 보기 때문일 터이다. 기쁜 눈은 가슴을 달뜨게 하지만, 슬픈 눈은 냉엄해지게 한다. 이천오백 년 전 인도의 유마힐은 칭병하고 누운 채 문병하러 온 사람들에게 불가사의 해탈(不可思議 解脫)을 설했다. ‘유식학(唯識學)’에서, 우리의 눈이 별빛을 만든다고 했다. 너희들 자신만의 독특한 슬픈 눈을 지니도록 하여라. 그 눈으로 너희들의 눈에 투영된 풍경을 증언하도록 하여라. _486쪽, 「길 굽이굽이에 솔잎을 뿌려놓는다」에서
오래전에 교육연구가인 한 친구가 무슨 세미나인가를 앞두고, 나에게 물었다. 그 행사 모두에 기조연설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느냐고…… 그가 애매모호한 질문을 했으므로 나도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소.” _491쪽, 「길 굽이굽이에 솔잎을 뿌려놓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