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는, 어떤 의미에서,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지되었다.”
이 책은 이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국 사회의 중대한 분기점이 된 ‘세월호’ 이후 긴 침묵의 시간, 사유의 숨고르기를 거치고 난 뒤 비로소 저자는 이 책을 묶어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미학-정치’이다. ‘정치-미학’이 아니라 ‘미학-정치’, 정치에 어떤 미학이 있다거나 정치가 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꾸로 어떤 미학이 그에 따른 특정한 정치를 파생시킨다는 것이다. 이때의 미학은 흔히 이해되듯 미와 예술에 대한 담론이 아니다. 인간과 그 인간들의 사회 안에 흐르는 감성, 감각적인 것에 대한 담론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감성, 감각적인 것에 대한 일종의 ‘지도’로서의 미학이 바로 우리의 정치성의 ‘영토’들을 구성한다.
이 책의 제목은 그런 ‘감성’의 차원을 여러 대조적인 형용사들로 압축해서 표현한다. 미학과 감성은 명사나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의 사유임을 제목에서부터 이미 이렇게 암시한다.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하고 그 역설과 모순이 생명력 자체로 작동하는 한국 사회의 기이한 과거/현재에 대한 직관이자 통찰이며 동시에 다가올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이 제목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에서 드물고 고귀함이란 오히려 헤프고 남루한 것 안에서만 발견되는 일종의 성스러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책은 “오직 남루함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어떤 탁월한 드묾, 그리고 오직 헤픈 보편성 안에서만 발명할 수 있는 어떤 탁월한 고귀함”에 대한 이야기다.(18쪽) 그래서 또한 이 책이 다루는 미학은 ‘드물고 고귀한’ 상부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하는 ‘헤프고 남루한’ 기저의 조건이 된다.
“지고의 미학은 드물고 고귀한 것, 지상의 정치는 헤프고 남루한 것일지 모른다. (…) 드물고 고귀한 것은 헤프고 남루한 것과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물고 고귀한 것은 그렇게 헤프고 남루한 것을 통과할 때에만 비로소 바로 그 자신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고의 것은 지상의 나락으로 처박힌다. 드문 것은 남루한 것 안에 있고, 헤픈 것 안에서 고귀한 것이 등장한다.”(87쪽)
세월호냐 천안함이냐
저자는 천안함과 세월호, 이 두 배의 이름과 그에 얽힌 사건의 이미지들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유일한 철학적 대상’이며, 이는 또한 우리의 ‘미학’과도 직결된 문제라고 밝힌다. 이 두 배의 이름은 더이상 단순한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정치는 ‘우리’의 이름으로 ‘천안함’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고 소환하며, 반대로 ‘세월호’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려고 애쓴다. 이러한 정치는 어떤 감성의 지도, 어떤 미학의 경계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진리나 윤리가 미학의 전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미감을 이루는 감성적인 것 자체가 바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진리나 윤리를 근거 짓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천안함이냐, 세월호냐. 이것은 우리에게 마치 하나의 정치적 선택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아닌가, 모든 ‘우리’들은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천안함으로 재현되는 서사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월호로 상징되는 서사를 선택할 것인가, 이는 마치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갖는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선택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적 시험지 역할을 하게 되어버린 것. 그러나 또한 이러한 선택이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선택지의 구분 혹은 이러한 이분법은 그 자체로 ‘우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가 지칭하는 집단이 전혀 다른) 이름으로 호명된 주체들이 사회 안에서 나누고 있고 또 그 스스로가 나누어져 있는 어떤 감성의 지도를, 그 미학의 분배/구획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지표이자 핵심적인 징후가 된다.”(20~21쪽)
‘우리’ 시대의 ‘미학-정치’
그렇다면, 다시 ‘미학’의 의미를 돌아봐야 한다. 미학(美學)이라고 아름답고 편협하게 번역된 의미가 아니라, aesthetics의 본래적 의미, 근원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학이 하나의 학제로서 성립한 것은 칸트 이후인데, 우리가 통상 ‘미학’으로 번역하는 독일어 ‘Asthetik’, 영어 ‘aesthetics’, 프랑스어 ‘esthetique’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학’ 또는 ‘감성학’의 의미에 더 가깝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학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을 다루는 칸트의 ‘감성학’에 맞닿아 있으며, 또한 자크 랑시에르의 핵심 개념인 ‘감각적인 것의 나눔/분할/분배’가 의미하는 정치적 함의를 반영한다. 랑시에르는 ‘감각’ 혹은 ‘감성적인 것’의 어원에서 미학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랑시에르에 의해 새롭게 이해된 미학, 감성학, 감각학에 따르면, “하나의 미학이 특정한 정치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정치가 바로 특정한 미학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무엇”(413쪽)이다. 그러한 감각적인 것의 지형도 위에서 어떤 정치가 가능하며 또한 불가능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개념인 ‘미학-정치’의 지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시위를 이어간 시민들은 옳았고 그들을 조롱하던 ‘일베’는 틀렸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 ‘일베’의 비-정치와 몰-정치를 구성하는 조건 역시 그들의 어떤 미학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서로 다른 미학의 충돌, 상충하는 감성의 세계관이 격돌하는 전장이다. 그래서 이 책은 또한 바로 그 ‘미학의 전장’ 위에서 드러나는 아픔들에 주목하면서, 그 전장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거나 불가능해지는 ‘정치의 지도’를 그리고자 한다.
쉬운 예로, 남한에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심지어 자칭 반민족주의자나 반국가주의자라 할지라도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본능처럼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는 어렵다. 우리는 ‘애국’의 이데올로기가 상상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구성물임을 알고 있음에도 감성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미학과 감성의 영역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더욱 긴급한 문제는 단순히 협소한 정치적 영역에서의 설득이나 반전이 아니라 오히려 기저의 미학과 감성의 영역에서 시도할 수 있는 어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의 ‘혁명’이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촛불 집회의 반대편에서 벌어졌던 태극기 집회는 역사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 스스로 국가의 대변자라도 되는 양, 집단적인 가해자/권력자로 스스로를 자기매김한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집단이 어떤 미학의 지도, 어떤 감성의 나눔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의식, 사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의식, 핍박받는 자와 핍박하는 자의 의식은, 그래서 단순한 ‘정치적 의식’의 구분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감성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미학적 무의식’의 산물일지 모른다.
사유와 이미지가 교차하는 감성의 지도
이 책에는 보도사진과 현대 회화, 영화 속 장면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등장하며, 이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우리 시대 ‘미학-정치’의 풍경을 구성한다. 강제철거에 항의하는 시위자를 위협하는 용역 깡패의 폭력적 이미지가 등장하는가 하면, 타워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이불 빨래를 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어진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 <십자가형>과 빌 비올라의 <낭트 삼면화>를 경유하여 시선, 감각적인 것의 분할을 사유하기도 하고,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과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병치하면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절멸’의 욕망과 신화를 들여다본다.
현재와 과거, 동양과 서양, 범속한(‘남루하고 헤픈’) 이미지와 예술적(‘드물고 고귀한’) 이미지들의 잡종적인 교차는 이 책에서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이 시대 미학-정치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전략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한 현상들 위에 데리다와 들뢰즈,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논의를 끌어와 유려하게 펼치는 혼종적인 글쓰기는 그 자체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동시적이면서 시대착오적으로 병존하는 한국적 사유의 지형도를 스스로 재현하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선언의 픽션, 금기의 딕션’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 개의 장에서는 비평적 에세이(딕션)와 허구적 이야기(픽션)가 교차하는 또다른 내용-형식의 전술을 시도하기도 한다. 탈출구가 없는 듯 보이는 이 시대의 알리바이를 분쇄하고 그 아포리아, 곧 그 ‘길 없음’에서 오히려 어떤 ‘길’을 내려는 이 ‘불가능성’의 모든 전략과 시도들은, 결국 정치적 쇄신이 아니라 미학적 혁명의 ‘가능성’으로 통한다.
후기/뒷면의 제목에도 나오듯,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실상 제대로 포스트모던인이었던 적은 없는 이 착종과 분열, 불협화음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자화상에 다름 아니며, 이 책은 형식과 구성 면에서도 그 자화상을 재현하고 더 나아가 그 분열을 덧내면서 그 상처의 흔적을 순례하는 기록, 아픈 사유의 악보이다.
“순례한다는 것, 그것은 감각의 지도를 새로 그린다는 것, 미학과 정치의 새로운 지도 제작법을 꿈꾼다는 것, 그러나 안온한 산책 안에서가 아니라 위험천만한 경계 위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명된 증상을 진단하고, 그 증상에 도리어 상처를 내 균열을 열며, 그 균열이 만들어낸 흔적을 순례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나와 당신, 우리 동시대인 앞에 놓인 사유의 작업, 미학과 정치의 지도를 다시금 새롭게 짜고 제작하기 위한, 하나의 지침일 것이다.”(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