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사회의 불화, 자연의 끝 모르는 충동,
그 파괴의 자연사를 누구보다 예민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느꼈던 인물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는 세 인물의 흔적을 따라가는 세 폭짜리 그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이젠하임 제단화>로 알려진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8세기 독일 자연과학자이며 의사로 비투스 베링의 캄차카 탐험에 동행한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 그리고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 자신으로 엮어낸 문학의 세 폭 제단화다. 이들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제발트 자신을 포함하여) 저마다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다 갔지만, 작가는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자연과 인간 사회의 불화, 자연의 끝 모르는 충동, 그 파괴의 자연사를 예민하면서도 고통스럽게 감각했다는 사실에 이끌렸다.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세 인물의 공통점을 은밀하게 겹쳐내고 그 아득하고도 희미한 실마리들을 직조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로 아름다운 시의 언어를 완성해냈다.
세상으로부터 숨은 화가 그뤼네발트
제1부 「알프스의 눈과 같이」에 등장하는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455?~1528?)에 대해서는 생애는 물론이고 이름부터 출생지까지, 하나도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사후 150년가량 거의 잊힌 예술가였다가, 독일 미술사가 잔다르트에 의해 1675년 미술사에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전까지 그뤼네발트의 대표작 <이젠하임 제단화>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제발트는 역사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화가 그뤼네발트의 흔적을, 작품들과 그 안에 숨겨진 화가의 자화상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방식으로 추적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다른 제발트 작품에서와 달리 시각 자료가 등장하지 않는다. 시각 자료의 누락은 독자들이 회화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을 해석하는 제발트 자신의 시선을 따라와주기를 바라는, 즉 이차적 감각 행위를 의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특히 참혹하게 리얼하여 강렬하고 격앙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이젠하임 제단화〉 중 〈십자가의 예수〉의 작업 배경과 작품 자체를 묘사한 언어에 주목하게 된다. 성서 속 한 장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제발트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들—한편으로는 전염병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농민전쟁과 종교개혁이라는 변혁의 물결을 겪느라 사방에 죽음의 광란과 공포의 기운이 감돌던 지상의 풍경과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전염병의 공포에서는 간신히 벗어났지만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채 혁명에 뛰어든 농민군들은, 곡식이 베어지듯이 학살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눈알이 파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그뤼네발트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다. 화자는 침묵하고 독자들에게는 암전이 찾아온다. 1525년 5월 18일의 일이다.
인구과잉의 도시를 떠난 의사 슈텔러
「시편」 139편의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두번째 이야기 「그리고 내가 바다 끝에 가서 머물지라도」에 나오는 인물은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1709~1746)로, 덴마크 출신의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1733년부터 1743년까지 이끈 시베리아 캄차카반도 탐험에 동행한 독일인 의사이자 자연과학자다. 늘 먼 곳으로의 탐험을 꿈꿔왔던 성장기를 지나 우여곡절 끝에 캄차카반도에 가게 된 슈텔러는 현지의 생태와 환경 조사에 힘썼고, 토착민인 이텔멘인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풍습과 민속, 언어를 연구한다. 그곳에서 다시 길을 떠난 탐험대는 유럽 역사 최초로 알래스카 만에 닿게 되고, 슈텔러는 그곳에서도 식물과 동물, 기후와 지형을 관찰하는 한편 그곳 토착민들과 교류한다. 이들은 이후 러시아로 되돌아오던 중 훗날 베링 섬이라고 불리게 되는 무인도에서 좌초하고 만다. 대원들은 섬에서 스스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영양 결핍과 괴혈병, 추위와 습기, 절망과 질병으로 선장 베링을 비롯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생긴다. 그들을 묻고 돌아온 슈텔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부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이 러시아 정부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의 고발장이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미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허약해져 있던 그의 육신은 곧 열병에 걸린다. 마지막 남은 최후의 안간힘으로 여정을 계속하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2000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의 튜멘에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사회로부터,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신의 소명을 다했던 슈텔러에게서 제발트는 스스로의 또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일생 동안 여행자이며 연구자로 살아온 슈텔러와 마찬가지로 제발트 또한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여행자이며 연구자인 화자이기 때문이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간 작가 제발트
삼부작의 마지막 「어두운 밤이 전진한다」는 작가 자신과 생애가 일치하는 화자가 등장하는데, 제발트는 이 시편을 두고 일종의 “전후(戰後) 시대의 자연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 걸맞게 이 이야기는 선사시대의 화석층을 관찰하면서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진 일화, 자신이 제2차세계대전 뉘른베르크 폭격 즈음에 잉태되어 종전 즈음에 태어났다는 화자의 고백은 잉태와 전쟁, 탄생과 파괴의 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정작 화자-저자는 성인이 될 때까지 태어나기 직전에 일어났던 전쟁과 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바가 없었다. 전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던 전후 독일, 그것도 외진 골짜기에서 자랐던 탓이다. 1966년 영국 맨체스터로 이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이 사람들에게 실제의 상흔을 남겼음을, 그뤼네발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질병의 색채가 그대로 현실임을 알게 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남겨놓은 “죽어버린 신화의 강”을 처음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전쟁과 자본의 흔적을 따라 걷고 헤매면서, 그 황량한 풍경 속에서 역사를 되불러낸다. 이 시의 마지막 편에서 화자는 자신이 태어난 독일로 떠나는 꿈을 꾼다.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에 있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드로스 대전〉을 보기 위해서다. 〈알렉산드로스 대전〉은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아나톨리아의 이소스 평원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삼세를 무찌른 대전투다. 화폭에는 ‘무한히 하찮은 인물들’이 필사적이고 치열하게 삶과 죽음의 난투를 펼치는 살육장 위, ‘웅장한 자연의 불가해한 아름다움’이 궁형으로 펼쳐진다. 화가는 이 전투 장면의 배경을 그릴 때 특이하게도 지도상의 남쪽을 위쪽으로 배치했다. 그래서 그림의 위로 지중해와 키프로스 섬이 보이고, 그 뒤로 홍해가, 오른편에는 이집트와 나일 델타가 있으며 가장 먼 곳에서 아프리카의 설산 봉우리가 희게 빛난다.
첫번째 시는 그뤼네발트의 죽음으로 끝나며, 두번째 시는 슈텔러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세번째 시는 벽에 걸린 알트도르퍼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죽음이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다”라고 쓴 카프카를 인용하며 막이 내린다. 그뤼네발트와 슈텔러의 죽음, 그리고 얼마 후 도래할 작가 자신의 죽음은, 승리와 영광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파괴의 자연사’를 쌓아가는 인간 역사를 묘사한 알트도르퍼의 그림에 투영되고 있다. 이러한 죽음이라는 내용과 더불어, 이 세 편의 이야기시는 모두 흰 눈의 이미지로 끝난다. 초월과 형이상학, 그리고 세계의 ‘정지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흰 눈.
이 모든 인물, 일화, 이미지를 써내려가고 죽음과 흰빛으로 마무리하면서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어쩌면 언젠가는 불가피하게 “소리없는 재앙”을 불러오게 될 맹목적인 자연, 그 자연과 인간의 불가피한 불화일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의 기초, 본래의 아름다움, 언젠가는 그 본래의 자유를 위해 인간 문명을 물리쳐버릴 자연이라는 유토피아. 그러나 동시에 파괴의 힘을 감각하고 고요 속으로 침잠했던 은둔의 인물들은 자연의 유토피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문학을 매개로 하여 다시 인간의 삶, 우리의 눈과 마주친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린 최후의 문장들: 삶, 사랑, 죽음, 물, 불, 선, 악. 다시 생명과 존재에 대한 물음. 이것이 우리 앞에 또다른 언어의 옷을 입고 도착한 제발트 최초의 물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