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번이고 다시 태어나고 싶도다.
백만 번이고 다시 태어나 이 책들을 모두 읽고 싶도다…
책벌레들이라면 공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장엄한 세계.
—김연수(소설가)
『종이달』의 가쿠타 미쓰요와 『장서의 괴로움』의 오카자키 다케시가 함께 쓴 도쿄 헌책방 순례기!
헌책도(道)의 대가인 오카자키 다케시 사부의 지령을 받아 제자 가쿠타 미쓰요는 오늘도 부지런히 헌책을 찾아다닌다. 책과의 만남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신감각 독서 가이드, 특별한 도쿄 여행 에세이이자 책 덕후들을 위한 헌책방 순례기 『아주 오래된 서점』이 출간되었다.
오카자키 다케시는 3만 권에 이르는 책을 처분하기 위한 분투기와 자신이 아는 장서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서의 괴로움』으로 한국의 애서가, 장서가들의 뇌리에 인상 깊게 새겨진 이름이다. 그는 이 책 『아주 오래된 서점』에서 헌책 도장(道場)의 도장주(主) 역할을 맡아, 헌책도를 깨우치고자 찾아온 소설가 가쿠타 미쓰요에게 책과 서점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가쿠타 미쓰요는 사부가 내린 지령에 따라 진보초, 다이칸야마와 시부야, 와세다, 니시오기쿠보, 가마쿠라 등지의 헌책방을 찾는다. 지령은 각각 ‘헌책의 왕도인 진보초에서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책을 찾아라’ ‘헌책방의 미래형, 다이칸야마와 시부야에서 책 진열법을 배워라’ ‘와세다 헌책 거리에서 청춘 시절의 책을 찾아라’ ‘니시오기쿠보에서 균일가 매대를 노려라’ ‘가마쿠라에서 그 지방 작가의 책을 찾아라’이다.
지도를 쥐고 헌책방 순례에 나선 가쿠타 미쓰요는 첫 목적지인 진보초에서 “‘오, 외지인이 왔다’라고 거리 전체가 쑥덕거리는 듯”한 쌀쌀맞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열 개 지역 스물여덟 개 헌책방을 찾는 여정이 이어질수록 “걷지 않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는구나. 이렇게 소우주에서 뛰어나가보는 것도 상당히 좋은 경험이다”라고 느끼게 된다. ‘(헌)책’을 매개로 시야를 넓히고 삶의 지평을 확장시켜나가는 가쿠타 미쓰요의 명랑하고 진솔한 문장들은, 그녀가 20여 년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하며 주요문학상을 석권한 소설가이기 이전에 독자이자 애서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헌책방은 일반 서점보다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전쟁을 사이에 둔 종이의 역사가 있고, 출판사와 작가의 시행착오가 있으며, 인쇄술의 변화가 있고, 사람들의 생활이 있으며, 조상의 지혜와 장난기가 있고, 시대의 색과 거기서 불거져나온 선(線)이 있으며, 그리하여 끝없는 낭만이 있다.
_가쿠타 미쓰요(6쪽)
헌책방 순례의 목적은 그저 책을 사러 가는 것이 다가 아니다. 가게에 이르기까지 풍경 구경도 재미있고, 기분도 즐겁다. 책을 읽듯 거리를 읽는다. (…) 최단 거리로 헤매지 않고 도착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비즈니스의 세계. 원래 헌책방 순례는 자본주의 원리와도 경제 효율과도 관계없으니까. 헌책방 순례는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리를 미로로 바꾸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헌책의 힘이다.
_오카자키 다케시(61, 91쪽)
오카자키 사부는 제자가 지령을 수행하는 과정과 골라온 책들에 대해 첨언하며 책과 출판의 역사는 물론, 헌책이 품고 있는 시대와 사상, 사회와 문화를 종횡무진 오가며 헌책도를 설파한다. ‘어떤 시대에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대가 변하고 전혀 쓸모없어진 책’이자 ‘시대가 남긴 선물’인 균일가 매대에서 자신의 안목과 센스로 책을 고르는 법, ‘초판본·사인본·심지어 염가’인 책에 대한 고찰, 해당 지역 출신 작가들의 책을 찾아보는 일의 즐거움까지, 방대한 지식과 연륜을 토대로 한 가르침이 조목조목 곱씹을 만하다. 헌책도의 기본이란 이처럼 헌책방에 팔린 시점에서 한 번은 죽은 것처럼 보였던 책이, 실은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부가가치가 덧씌워져 되살아나는 일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이리라.
이번에 걸었던 도쿄 역과 긴자는 독특한 역사와 풍속이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다. 이들 거리에 있는 헌책방은, 헌책방이면서 동시에 도쿄라는 곳을 내내 지켜본 시대의 목격자이자 증인이다. 그들은 이 나라의 한 면을 진열장에 몰래 조용히 섞어두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것보다 훨씬 전에 이 나라, 이 거리에 살았던 사람들의 즐거움과 숨결이 현재로 살그머니 이어져 헌책방 여기저기에 가로누워 있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몹시 자극적인 일이었다.
_가쿠타 미쓰요(84~85쪽)
‘책’과 관련된, 그러나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두 사람이 글을 이어가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진다. 독자 역시 가쿠타 미쓰요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고, 오카자키 다케시의 첨언을 들으며 헌책방의 풍경을 다시금 되새기는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헌책(방)이 주는 불가사의한 매력에 자연스레 빠져들 것이다.
“이 책이 여기서 나를 기다린 것 같아 기쁘다”
헌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발견’하는 데 있다. 어린 시절, 혹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책을 찾아가는 과정은, 새로 나온 책을 구하기 위해 들르는 일반 서점에서 좀처럼 얻기 힘든 경험을 하게 한다. 낯익은, 그러나 잊고 있던 책 한 권 덕에 떠올린 기억들. 그런 책들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묘한 안도감과 위안. 숨가쁜 일상을 잠시 잊게 하는 노스탤지어의 세계. 이것이야말로 헌책과 헌책방의 힘이 아닐까.
서른일곱 살. 이렇게 다 자란 인간이, 헌책방 순례를 통해 느릿느릿하게나마 세상사를 배우고 있다. 헌책방이란 정말로 심오한 곳이구나. (…) 1년 동안 여러 동네의 여러 헌책방에 들렀다. 어느 서점이든 그 서점만의 온도가 있어서, 그 온도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는 즐거움보다 안도감 쪽이 더 컸다. 책은 소비되고, 잊히고, 사라지는 무기물이 아닌 체온이 있는 생명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어서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_가쿠타 미쓰요(241, 244쪽)
★
추천사
이 책을 읽는 기분은 좀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다. 왜냐하면 이제 서울에서는 헌책방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니까. 모모한 중고책방들은 할인책방이지 헌책방은 아니니까. 그런데 도쿄에는 여전히 헌책방이 많다. 얼마 전에도 진보초의 서양서 전문인 기타자와 서점에 갔다가 서가에 빼곡히 꽂힌 영문학 전집들을 보고는 나도 몰래 중얼거렸다. 백만 번이고 다시 태어나고 싶도다. 백만 번이고 다시 태어나 이 책들을 모두 읽고 싶도다. 그처럼 책벌레들의 원더랜드인 도쿄와 그 주변의 헌책방을 1년 넘게 다니며 헌책방계의 스승 오카자키 다케시가 낸 과제를 소설가 가쿠타 미쓰요가 수행하는 과정이 이 책에 담겼다.
예컨대 ‘와세다 헌책 거리에서 청춘 시절의 책을 찾아라’라는 지령을 받은 가쿠타는 와세다 대학교 앞 헌책방인 ‘고서 겐세이’에서 가이코 다케시의 사인본 『베트남 전기』를 ‘득템’한다. 그 사연을 전해 들은 스승 오카자키는 이런 논평을 덧붙인다. 1965년 2월 14일, 『베트남 전기』를 쓴 가이코 다케시와, 거기에 실린 사진을 찍은 아키모토 게이이치는 베트남전쟁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이후 두 사람은 매년 2월 14일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단둘이서 밤새워 술을 마셨다. 그러나 1978년 2월 14일부터 갑자기 그 관례가 중단됐다. 이듬해 6월 27일 아키모토 게이이치가 암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에 오카자키는 그만의 방식으로 그 시절을 회고한다. “나는 아키모토의 죽음을 추도한 가이코의 글 「두 번 죽은 남자, 나의 벗 아키모토 게이이치」가 실린 『주간 아사히』 1978년 7월 13일호를 사서 책장을 펼쳤지만, 손이 떨리고 눈앞이 흐려져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 줄을 쫙쫙 긋는다. 책벌레들이라면 공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장엄한 세계다.
—김연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