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캐비닛’ 속에는……
파일 No. 1
“이번 달에는 꽤 많이 자랐어요. 보이시죠? 뿌리가 살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잖아요. (……) 정말 굉장해요. 이번 달에도 엄청나게 자랐어요. 똥을 썩힌 거름을 바른 게 효과가 있나봐요.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요, 하하. (……)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햇빛은 어느 정도 받아야 하는 건지,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교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팔을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교배를 해주는 건지, 아니라면 벌이나 나비가 해주는 건지. 저는 벌을 싫어하는데 어떻게 하죠? 하지만 괜찮아요. 나비는 좋아하니까요.” - -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파일 No. 2
문득 내가 곧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지만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 운동장에서 빠져나왔어요. 학교 운동장에 시체를 두면 안 되니까요. (……) 분리된 몸이 죽는 주말에는 항상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남해로 갔어요. 처음엔 무섭고 떨려서 그냥 산에 묻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아는 스님이 있어서 암자에서 몰래 화장을 합니다. (……) 저에게는 일곱 번의 죽음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죽은 제 몸을 처리해야 했어요. (……) 재에서 나온 제 뼈들은 무척 뜨거워요. 뜨거운 뼈를 만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죠. 아름답고 행복한 나는 모두 죽어버리고 이 밀리미터 나사를 돌리는 나만 지겹고도 지겹게 오래 사는구나.
파일 No. 3
시간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을 타고 있다가,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혹은 멍하니 시계를 보고 있다가 그들은 짧게는 십 분에서 두세 시간을, 길게는 며칠에서 몇 년에 이르는 시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 자신은 불과 몇 초가 지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저의 사라진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걸까요. 그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파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요. 사라진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낭비도, 폐허도, 후회도, 상처도,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다는 느낌도 없죠.”
파일 No. 4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얼굴이 바로 나였어요.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죠. 분명히 나 자신이었어요. 진짜 나 말이에요. (……) 다가가서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았어요. 마치 자기 신체의 일부를 만지는 것같이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어요. (……) 우리는 모텔로 갔어요. 섹스를 했죠. 즐겁고 기묘한 섹스였어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이 사람과 왜 섹스를 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섹스 말이에요. (……) 우리는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제가 먼저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잠든 제 모습을, 아니 잠든 그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죠. 잠들어 있는 제 모습은 뭐랄까, 아주 사랑스러웠어요.
파일 No.5
_그녀는 일기를 읽는다.
_그녀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과거를 고친다.
_시간이 지나 그녀는 자신이 일기를 고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_그녀는 다시 일기를 읽는다.
_이제 수정된 과거가 그녀의 기억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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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후의 혹은 인류 최초의 인간, 심토머
172일 동안을 자고 일어난 토포러(toporer)들, 잃어버린 손가락 대신 만들어넣은 나무손가락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육질화(肉質化)되어가는 피노키오 아저씨, 남성성(기)과 여성성(기)을 모두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정액을 자신의 질 속에 집어넣어 스스로 임신을 하기까지 하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낡은 캐비닛 안에는 온갖 기이하고 특이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잠시 역겨움을 느끼고, 분노케 하고, 또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하는, 특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정작 이 이야기를 전하는 ‘평범한’ 화자 역시 백칠십팔일 동안 캔맥주를 마셔대고 하릴없이 캐비닛 속 파일들을 정리하는 그야말로 ‘평범한’ 삼십대 직장인이며 그의 동료 손정은씨는 초밥을 너무 좋아해 한 번에 백 개가 넘는 “특대” 초밥을 먹어치우며 월급을 모두 밥값으로 날려버리는 아가씨다.
작가는 이들을 심토머(symptomer)라 부른다.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정의가 학계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라 부른다. 심토머들은 생물학과 인류학이 규정한 인간의 정의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그들은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쩌면 최후의 인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은 이 심토머들의 기록과 이를 정리하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은 어느새 믿지 못할 일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며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디 소설 속에만 있겠으며, 사람이기보다 차라리 고양이가 되고 싶고 차라리 나무인형이 되고 싶은 고통스런 인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다른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를 혹은 자신의 분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또 얼마나 많은가.
이 소설에서 ‘캐비닛’은 이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담아두는 하나의 용기이다. 작가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캐비닛 안에 넣은 다음 탄탄한 필력과 구성진 입심을 이용, 적정 온도와 습기를 유지해 이들이 상하지 않도록 한다. 부패되지 않은 싱싱한 ‘진짜 이야기’가 보고 싶다면 우리는 가만히 이 캐비닛만 열어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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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캐비닛』
은희경, 전경린, 천명관, 박진규 등 대형신인의 뒤를 이을 2006년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자는 김언수. 2002년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부문을 통해 이미 등단한 작가의 장편소설 『캐비닛』은 일곱 명의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뽑은 작품이다.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론’을 두고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능력 속에 이 작가의 자질이 감추어져 있어 보인다. _김윤식(문학평론가)
상상력의 기발함과 대담함, 이제까지의 소설세계를 폭파시켜버릴 매머드급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꺼이 이 소설을 그 첫머리에 놓을 수밖에 없다. 멋지다, 『캐비닛』! _신수정(문학평론가)
파격적인 형식을 갖고 있지만 구성적 필연성을 갖고 정밀하게 잘 짜인 소설이며 능청스러운 ‘구라’가 일품이었다. _은희경(소설가)
이 장편은 인간이 만든 질서하에서 멸종의 위기를 만난 인간적인 것, 그것의 진실에 대한 애정 어린 기억의 예술이 되었다. _황종연(문학평론가)
『캐비닛』은 신기한 이야기들과 신선한 화법을 시선을 끌었다. 이 작가의 캐비닛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소설들이 읽고 싶어졌다. _이승우(소설가)
재기 넘치는 작품이다. 세상의 진실이 새로운 은유의 산도를 통과해 삶의 실체에 접근할 때, 예기치 못한 환기가 불러일으키는 낯선 조짐에서 정적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그런 특이한 정적을 품고 있다. _전경린(소설가)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 _류보선(문학평론가)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아니 책장을 이미 넘겼다면 독자들은 이 칭찬일색의 심사평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황당하고 이상해 보이지만 실은 각자의 캐비닛 안에 하나씩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만만찮은 필력에 힘입어 생명력을 얻는다.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각각의 에피소드와 화자의 이야기들은 제자리에 꼭 맞춰진 레고조각처럼 완성된 형식미를 보여준다.
“『캐비닛』은 이야기란 스토리가 아니라 그것의 조립방식, 즉 플롯에 있음을 웅변한다. 혹 그것은 대서사가 소멸된 시대의 새로운 서사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은아닐까. 어떤 기이한 이야기도 일상 속으로 흡수해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판타지 같은 현실 속에서 이야기가 스스로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배치를 뒤바꾸는 것, 그리하여 매번 전혀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것, 그것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신수정)
마법은 오랫동안 서서히 일어나는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게 다 마법이고 자연이란 게 다 마법이야. 갓 태어났을 때의 그토록 조그만 아이가 이 사람처럼 덩치 큰 장정이 되고, 다시 작아져서 꼬부랑 노인이 되고, 다시 흙이 되고, 바람이 되는 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기적적인 일이지 않나? 저 나무들을 봐.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한정없이 울창해지고, 가을이면 풍요로워지고, 겨울에는 그 많은 잎과 열매를 다 떨어뜨리고 한철의 죽음을 넘기지 않나. 참 신비로운 일이지. 이런 게 다 마법이야.
특이하고 기이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작가는 끊임없이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라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눈이 오는 것처럼.
자, 이제 책장을 모두 덮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내 안의 캐비닛 속에는 어떤 기이한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있는가. 앞으로 김언수라는 작가는 화수분과도 같은 자신의 캐비닛 속에서 또 무엇을 꺼내 보여줄 것인가.
* 초판발행 2006년 12월 21일
* ISBN 89-546-0259-2 03810
* 신국판 | 392쪽 | 9,800원
* 책임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8865, 3561)
상상력의 기발함과 대담함, 이제까지의 소설세계를 폭파시켜버릴 매머드급 이야기!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