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출간!
제1회 『새의 선물』의 은희경, 제2회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의 전경린, 제3회 『예언의 도시』의 윤애순으로 이어지면서 ‘대형신인’의 산실로 자리잡아온 ‘문학동네소설상’이 제5회 당선작으로 김영래 장편소설 『숲의 왕』을 선보인다.(1999년 제4회 때에는 아쉽게도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본심 심사는 김화영, 오정희, 윤흥길 세 분이 맡았다. 김영래(金榮來, 37세) 씨는 1997년 『동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지만 거의 무명에 가깝다. 소설은 이번 수상작 『숲의 왕』이 처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숲의 왕』은 그런 이력을 가볍게 뒷전으로 돌려버린다. 그만큼 익어 있고 묵직하다. 결처에 대한 지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심사위원들은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의 장점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상상력, 묘사력, 분석력의 직관적 통합에 있다. 내가 처음부터 이 작품의 매혹에서 끝내 놓여나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심장부에서 세 페이지에 걸쳐 선보이는 ‘불’의 묘사에서 느낀 충격적 아름다움 때문이다.―김화영
‘숲의 형제단’이라 일컫는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특이하고 흥미롭다. 묘사와 비유 능력도 탁월하다. 작가의 깊고 진지하고 때로 천진한 시선 속에서 나무와 불, 물, 안개들은 소설 전편을 부드럽게 싸안으며 타오르고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오정희
메시지의 중량감과 그 메시지를 시종일관 어기차게 밀고 나가는 뚝심, 정확하고 힘있는 문체, 긴장미 넘치는 선연한 묘사력은 작가의 저력을 십분 신뢰하게 만든다. 가볍고 약한 주제, 개인의 사사로운 신변 이야기로 무성히 채워졌던 지난 세기의 맨 뒤끝에서 무거운 주제, 공동체 일반의 이야기를 끌어안은 채 새 천년의 험한 길을 가고자 하는 자세가 여간 미덥고 반가운 게 아니다.―윤흥길
작품 속에도 암시되어 있지만(215∼219쪽) ‘숲의 왕’이란 제목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첫번째 장(章)에서 가져온 것이다. 자연이 늘 보여왔으며, 인간의 오랜 신화적·종교적 상상력이 거듭 밝혀온 ‘죽음을 통한 재생’의 화두를 작가가 부여잡은 시대적 맥락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이 필요없을 줄 안다. 우리 시대 최대 현안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이미 그 절박성에서 발등의 불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그칠 줄 모르는 자본과 인간의 욕망이며, 그 대안들조차 환경정치나 환경산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영래씨는 그러나 무슨 대안의 메시지로 이 소설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최근 그 어느 작품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었던 풍성한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오늘의 인간’,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삶의 존립을 근원에서 묻는다. 그 물음은 우리 시대 전체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시적이기까지 한 비범한 묘사력과 생생한 삶의 이야기에 실려 실존의 비통한 목소리에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과연 이 세계는 살 만한가” “우리는 과연 행복하게 숨쉬고 있는가” 하는 도저한 질문을 독자의 내면에서 천천히, 그러나 선연하게 길어올린다.
그 질문과 만나는 과정이 우리를 힘들고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을 안내하는 작가의 문체는 시적이고 아름답다. 그 문체는 마치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숲의 맑은 공기를 마지막으로 사는 듯하다.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수상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놓고 있다.
신화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복원하고 있는 이 소설의 강점 중 하나는 자연의 생명력과 삶의 깊이를 묘사하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자연과의 교감을 묘사하는 부분은 시적인 황홀경을 느끼게 하며, 인간과 삶에 관한 통찰력은 잠언과 경구의 깊이로 다가온다. 신성한 자연의 음성을 듣는 듯한 그것은, 우리 소설의 새로운 영토를 만나는 기쁨이기도 하다.
바로 위의 인터뷰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 들인 시간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약 7년간이다. 그중에서 6년간은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를 병행했다고 한다.(『문학동네』 2000년 봄호에는 그때의 모습이 화보로 실려 있다.) 1997년부터 환경운동연합에 몸담았고 작가가 살고 있는 지역인 경기도와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의 〈창립선언문〉을 직접 썼다는 사실을 여기서 부연하는 것은 사족일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선언문의 글은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작가의 생각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본문 287쪽 참고)
‘숲의 왕’은 누구인가?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삶에 묵은 사연 하나씩을 품고,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 이름붙인 숲속의 공간에 새로운 삶의 장을 설정한다. ‘숲의 형제단’.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의 지향은 그 숲 입구의 편액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누구나 들어와도 되나 아무도 들어와선 안 되나니
이것은 침묵과 가난과 겸양과 기도의 자리.
한 잔의 물 한 움큼의 낟알로 하루를 나나
사랑은 한 두레박 감사는 한 가마니인 곳.
모두의 것이자 누구의 것도 아닌 정원.
―REX NEMORENSIS(숲의 왕)
자연의 풍요와 평화를 주관하는 신화 속의 ‘숲의 왕’은 죽음과 재생의 상징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숲의 왕’은 어디에 있는가. 이 소설은 그 ‘숲의 왕’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숲의 형제단’의 정신적 지주인 닥터 그린인가. 작가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살인사건들을 추리적 기법으로 따라간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있는 숲은 큰 불로 재만 남는다. 그리고 ‘숲의 형제단’은 해체된다. 그렇다면 ‘숲의 왕’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 숲 주변에서 대대로 살아온 산지기 임 노인이 그 질문을 떠맡는다. 노인은 화재로 폐허가 된 숲 한켠, 아들 성치가 목매달아 죽은 나무 아래에서 사나운 불길을 이겨낸 도토리 한 알이 견과 속의 속살을 열어 잿더미 사이로 연둣빛 새싹을 뽀조록이 밀어올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죽음을 통한 재생의 드라마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는 산지기 임 노인이 느리고도 당당하게 “나, 나는 숲의 왕이다”라고 소리를 내어보는 소설의 결말은 아주 더디게 찾아온 묵직한 감동이 된다.
덧붙이는 말:심사위원 김화영 교수가 “만약 바슐라르가 살아서 이 대목을 읽었더라면 그는 분명 『불의 정신분석』이나 『촛불의 불꽃』 어디쯤에 감동적인 한 챕터를 추가했을 것”이라고까지 평한 불의 묘사 장면(158∼160쪽)은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